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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오늘의 나가수를 분석하는 한강의 수십만의 영혼

by 마음대로다 2012. 9. 9.

오늘의 나가수를 분석하는 한강의 수십만의 영혼

 

 

 

 

 

 

 

 

오늘의 나가수는 문학평론가 최송미의 작품인 것 같다. 그는, 얼굴이 플룻 음악처럼, 알려져 있지 않고, 그래서 여자라는 소문도 있다. 그와 연락을 취하려면, 지금은 없어진 삐삐로 한다. 최송미는 갑자기 나타난, 저주받은 평론가 신현균의 마음에 흡족한, 문학 전문 평론가이다. 플라톤은 시인을 추방했는데, 그래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스스로 선언했으며, 이비에스에 한번 나왔는데, 이문열도 나오고, 백낙청도 나오고, 오대수도 나오고, 시나위 신대철도 나왔다. 목요일 저녁 여덟시, 우리는 얼만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다소 실험적이며, 할 때 있고, 안할 때 있는, 사람들 이야기 할 때 그냥 엔니오의 슬픈 음악을 직설적으로 깔아버리는, 그 시니피에에 사람들이 빠져서, 그가 나왔을 때는 일반 공중파가 마비 사태가 벌어졌다. 시인을 어째서 추방했는지. 그는 자기가 추방당한 사람처럼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중국 여행 같다. 삼국지는. 홍콩 영화의 중흥기, 번영기, 최전성기가 사라지고, 지금은 중국은 얼굴을 무섭게 하고 무조건 달라드는 전쟁만 같다. 중국은 아직도 사람들은 삼국지를 읽는다. 사람들이 기차만 타도, 수필과 시 중에 무엇이 좋으냐 하면, 수필이 좋다고, 없으니 문제가 아닌가요 웃으며 답할 수 있다. 시와 수필이 버무려진 것이면 좋을 것이다 한다. 그런데 당신 영화제작자, 당신은 당신의 숨은 열망을 그렇게 잘알면서 허구한 날 잘 모르는 고대 시대의 쌈질하는 영화만 찍느냐고 묻는다. 마시던 컵을 떨어뜨리고, 입술을 어버어버한다. 소리는 움짤대고, 성인 영화도 한번 찍고, 코메디 영화도 한번 찍으면서, 마치 고대 전쟁 영화는 생의 중심인 것처럼, 그 흔한 시인 영화 한 편 찍지 못하는 것이다. 찍는다 했다. 그러나 스콜피온즈. 스턴트 맨에 가깝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오직 공산 혁명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고 하는 테제. 그것의 벙커나 헤저드에 잠복하는. 어째서, 어째서, 몇 번이고 치고 또 치는지, 타이거 우즈가 아주 난색을 표현하는. 카멜레온처럼 숨어있던 중국의 시계는 깨져있고,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표정은 명랑할 뿐이다. 제자백가 시대에, 시인은 추방되지 않고, 은둔하여서, 적당히 의식을 불려, 사람들의 의식을 백이하게 하고, 초등학생의 두려움으로 일렬 지은 뒤에, 숙제만 숙제만 한정 없이 내주는 그런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된다는 것은 거의 왕푸징 거리의 한 문장 거리이다. 그렇다고 단번에 칼로 무를 자르듯이 말할 수 없는 것은, 자기 아버지가 아무리 봐도 둘리, 그런 쪽에 가깝고, 다음날 또봐도, 성격이 조금 엿보이지만 마음은 비단결 같은 총명한 학생은 멀리하고, 무협지의 전대협에나 충성하는 사람은 이리저리 잘 삶아보는 것 같은 것이다. 그것은 손일까? 아니면, 머리카락일까? 설마, 발은 아닐 것이다. 시인은 추방되지 않고, 사람은 추방될 수가 없다. 네 이년. 이 몹쓸 년. 아무리 가수 윤하가 거울을 보고 화를 내어도, 오늘처럼 예쁘고, 단정하게, 장교 정신의 이미테이션을 하고 있으면, 어디로 쫓겨나겠는가? 몹쓸 년. 밥 먹어. 하면, 사람들은 새 밥에다 감자 된장국을 맛있게 끓여서 대접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설마. 국가라고 할 것인가? 왜 이리 맛있는 물이 많은 것일까? 참 이슬. 참 이슬. 참 이슬. 우리나라 어떤 선승이, 머리가 타협적이 될까봐 물 마시는 것 조차 마다하겠는가? 밥을 먹고, 국을 먹는. 그것의 서울대학교 정문의 모습은, 고기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는 최고의 정신 같은 것인가?

 

일본은 한국을 유혹하는 것으로 아스카의 작은 새는 마지막을 비행하고, 중국은 한국과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는 안도의 한 숨으로 대륙의 어느 산골로 피신하는 것을 세상의 전부로 안다. 국가의 인구수는 사람이 혼자 있을 때, 성경책을 읽고, 티비로 나가수를 보고, 자동차를 타고 가끔 여행을 할 수 있느냐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은 허구일 때가 많고, 보통 소설을 허구의 미학이라고 한다. 그것은 플로팅이기도 하고, 플루팅이기도 하다. 어째서, 플라톤은 성경을 언급하지 않고, 성경은 공자를, 시황제는 성경을 언급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리 따지시나가 다시 말하지만 결코 아니다. 문예평론가 최송미는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선생이 유오성을 때리자, 아버지가 건담이라는 말을 함과 동시에, 성경이 창을 통해 교실을 들여다보는 어떤 만화가의 해석학적 한 장면처럼......

 

우리의 소설은 힘이 없는 것이, 여기서부터는 폐부이다. 우리가 만년의 약속 같은 문명의 저변을 닦은 것을, 상식과 이성, 문화와 성적 자유, 활발한 생각들과 이런저런 괴짜들, 사랑의 키스들, 무조건 키스들, 조기 축구회들, 민주 산악회들, 나와 김지수의 아름다운 사랑들, 세계 여행 프로그램을 둘이서 찍는데, 사람들이 둘 사이의 모나드는 너무 상상하지 않는, 네. 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태국에 왔습니다, 사와디캅, 옆에서 김지수가 사와디캅 하는, 종교는 반드시 광신주의나, 종교교회와 광신교회가 있는 것처럼, 저마다 서로를 왕처럼 여기고 충분히 마쎄이할 수 있는 것이다. 얼굴이 쾡하면 조금 어떤가? 그리고 프로그램을 찍지 않을 때 고양이가 될 때까지 하면 되지, 즐거움도 일이라고, 일에 전념할 때에 본질을 분간하지 못하는 짓은 해서는 아니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은 나도 안다. 우리의 소설이 힘이 없는 것이, 고전들이 서로를 인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의 마법에 걸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문학은 시는 잠깐, 영원토록 소설의 모범인데, 그것의 국민과 에코브리지?는 분명 성리학적 지식을 전제하는 것이다. 한동안 민주화의 시기에, 판금된 서적들이 출간되고, 과거 사회주의에 대한 지시성 같은 것을 예술적인 목적에서는 허용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수학적으로 보면 굉장히 웃기는 것이다. 네게 지금 이백 만원을 줄 터이니, 미션으로 쿵푸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서, 떠오르는 달을 찍고와야 한다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큰 항공 작은 항공 배를 타고서도 이집트에 다녀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자연이 되었다. 자연은 아름답지만, 퀴즈 때문에 서로 싸우고, 가족과도 싸우고, 친구들끼리 연락도 안하고, 누구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일부로 울릉도 호박엿을 구입하는, 공동구매, 것은 아닌 것이다. 퀴즈는 무등산처럼, 완전 인공적으로, 갑자기 느닷없이 내 한 눈에 저기 저 멀리 깎인 산과 같다. 인덕이 그렇게 훌륭했는데,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인 일인가? 오늘 나가수가 그렇다. 오늘 나가수는 그것을 잘 아는 사람들 같았다. 예술은 시간을 상대하며, 시간은 삶의 지배 원리이다. 성경이 시황제의 고전을 만나는 뜨거운 시간. 카테고리칼 임페라티브는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필요는 목적의 어쩌구이다. 오캄의 칼날. 국민대학교 철학과 학생이 친구에게 말하는 선언적인 시간. 비자연적인 서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