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있을까?
이 말은 격정을 전제한다. 암시한다. 그리고 젠부를 뜻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철학자는 예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는 예수. 작은 것 같아도, 전부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세종이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은 흐뭇. 므흣. 너무 흐믓하니까, 꺼꾸로 해도 므흣. 웃음의 이모티콘. ^^ 음악 감상의 혹은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방법의 세 가지는 무엇인가? 나는 습관이, 못되게 들었는데, 마치 영화 제목 같은 못된 습관, 질문과 대답을 합성한 것을 연속하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늘. 아주 오늘. 그것은 토르소. 흉상이기도 하고, 흉상이라면 가슴만 보여주는 것이 당근 아니라, 가슴 위로의 사람 소조를 뜻한다. 그것은 고전 같은가? 한번 착안해보라. 고전 같은가? 흉상은?
soso.....
누군가 그렇다고. 카르타고. 이태리 사람들은 한니발의 카르타고가 한국어로 그렇다고 한다면 할 때 그렇다고와 많은 발음이 같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을 전대 서점에서 떠들어본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과 엇비슷하다. 카나라즈. 종이비행기의 무한 접속사. 누구도 접속해 주지 않는 대기로의 비행 같은 쌩떽쥐페리.......
^^
그러나 전대 사람들은, 여기서는 전투전대, 전남대학교 모두를 가리키는데, 생각해야 한다. 꼼짝 없다. 무등산을 가장 아름다운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전남대학교 운동장에서의 무등산은 토르소 같고, 죽는 것은 원하지 않고 사는 것도 애매한 사람의 절대적인 인문학 강의 같은, 돌아갈 수 있을까?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패배할 수 없는 이와 같은 금강의 물음 앞에서, 푸부, 우리는 문학적으로 자책하고, 이론들을 물어 뜯고, 생맥주 마시고, 예언자의 땅콩 천원 안주 같은 것을 정물적 깊이로다 명상할 수 밖에 없다. 차를 타고 서울을 돌면, 우리 가뇽 선생의 세종 음반, 인간이 말을 사용하는 것의 지독한 가난을 맛보게 되는데, 그것은 광화문...... 언저리에 건물이 들어서기를, 자기가 차를 타고 광화문 도로를 일년 동안 삼백번을 돌고, 그렇게 칠년 동안을 돌아도, 될 화 자로 보이는 적은 한 번도 없었단다. 광화문 하면, 광주 같고, 사회적 감각이 없어서, 모랄 센스, 광주 같지는 않아도, 화는 될 화가 아니라, 불 화 자로만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 영화의 강릉 가는 미시령 터널에서 빛을 발한다. 강릉 경포대는 경제로 포장된 臺학교. 우리는 서로를 머리카락 붙들고 싸우자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선생이 어떤 문학 시간 같은 데에서 적게 하면, 어느 특수하고 모난 성격의 학생이 머리카락 붙들고 싸우면서 사라지고자 한다고 하겠는가? 그것은 여자. 남자들은 자기의 성역할을 찾고, 여자들에게 양도하지만 그들은 싸우지 않고. 달동네가 묘하게 돈은 조금 있고, 머리 물들인 심은하틱한 학생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종아리로 마구마구 뛰어다니고. 잘 안보여주고. 공부도 반에서 곧잘 일등을 하는 남학생이, 올드보이의 이진우 같고, 오등하는 친구는 오대수 같고, 그래서 오대수? 교회를 다니는 바람에 계급과 지능을 가로지르는 결혼의 운을 접할 수 있을 것 같은 저 먼나라에까지 미치는 영원한 우리 여학생들의 흥분 상태를 주변에 제공하는 것이다. 강릉 경포대는, 심사임당을 회복하고, 내가 당장 누군가에게 선물 받고 선물하는 마음의 산삼이나 인삼 곳감이 담긴 비단 포장의 상자를 마련하는 것인 것이다. 아닌가? 그것은 아닌가? 질주하면서. 그래도 그렇다. 아무리 생각이 특수와 첨단으로 동해 바닷가에 이른다고 하지만, 거기서 사는 사람은 우린 뭐레니? 하지 않겠는가? 강원도는 감자. 군대 생활 동안 먹었던 김치 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서강대학교 한학기를 다녔던, 틈만 나면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나 매우 재미졌던, 회상 속에서는, 내용으로 비교가 된다. 나는 음식으로 이뤄진 오작교를 건넜는지 모른다. 흰 쌀 밥. 부족하지 않는 고기 반찬. 그리고 김치 깍뚜기. 서강대는 나를 배반했고, 나는 강원도에서 미쳐 풀지 못한 피곤까지 덤태기를 쓰는 듯한 우주론적 경험을 겪었는지 모른다. 아닌가? 그것은 아닌가?
고전은 클래식 음악 영화와 같다. 그것의 삼대 요소. 고전 음악. 계속해서 반복되지만, 다른 하나는 레이블. 다른 말로는 출판. 산업. 대도시마다의 유명 거대 서점들. 음반 가게들. 우리는 하나님께 언제나 돌봄을 구하는데, 그것은 우연찮게 실족할까 걱정해서이다. 남자들은 여간해서는 하지 않으나, 여자들은 하이힐이 그렇다. 처음 회사에 들어가서, 하이힐을 신을지, 아니면 조금 평범한 힐을 신을지. 그것은 강릉. 혹은 선택적 외국어 발음의 시니피에 같은 경포대. 음악 영화는, 그것의 가장 낮은 레이블로서의 러브 스토리는
지금 내가 다 가져가고 있다......
그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주고 받는 대화가 전부 한국어로 이뤄진다는 것 밖에 뚜렷한 변화는 엿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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