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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우선순위란 무엇인가?: 힐러 10회를 중심으로.......

by 마음대로다 2015. 1. 7.

우선순위란 무엇인가?: 힐러 10회를 중심으로.......

 

 

 

 

 

 

 

 

서울에 포스트모데르네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각계각층 각개전투 공히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의 폐부는 분명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한강의 풍경에서 이미지즘의 종말을 맞이한다. 지방의 분권주의자, 불만주의자가 말하기를, 서울에 공항 밖에 더 있는가? 우리도 짓겠다 한 것들이 전국 또한 각계각층 요소요소에 있다. 그것의 분석은 힐러 같고, 제법 오키나와 공수도 일번의 품세를 갖고 있는 것 같으다. 나는 누구와도 포스트모데르네를 말한 적이 없다. 그래서 서울에 그것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대뜸 공항이나 짓고 보는 분권주의자와 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도 그러하다. 나는 허균처럼

 

 

힛바이피치드볼......

 

 

 

강원도 양양도 사랑하였다. 나는 사랑하지 않는 도시와 지역이 없었다. 나는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소니 캠코더 같았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리면, 슬펐고, 머리가 아팠다. 그랬던 내가, 김제를 지나고, 만경강을 지날 때 얼마나 마음이 힐러 같았겠는가? 그래도, 이런 나조차도 서울을 포스트모데르네의 담론이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여기는 그 무엇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아무 곳에서도 압박을 느끼지 못했다. 올드보이 ost를 중심으로, 구한말 효수를 당했던 무수한 영웅들조차 내게는 어필이 없었다. 대체 우선순위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의 합법적인 원리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인가? 대체 이집트와 피라미드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인가? 내가 서울을 오가면서 느꼈던 불만이라는 것은, 피라미드 꼭지점이 좁고 한정적이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힐러. 어안렌즈 속에서는 언제든 형태적으로 기상이 가능하다. 나는 그래도 똑똑한 여자가 있을 것이라는 헤도니즘이 있었다. 헤도니즘이라는 것은 해도 되는 것이냐는 문장과 의식의 흐름이다. 마포에 있는 비좁은 누나집에서 나왔을 때, 가든호텔이라든지, 한강으로 가는 길이라든지, 좀더 시청이나 교보문고 혹은 신촌을 가는 길이 엿보였다. 지금처럼 지능이 완전히 아래까지 왔다고 한다면, 재미삼아라도 걸어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초고속 오페라의 팬텀 비행기가 순간적으로도 뼈에 사무쳤기 때문에, 피라미드의 꼭지점이 늘 좁고 위태로웠기 때문에, 서둘러 내 있는 곳에서의 지배의 페러다임으로 귀의하는 편이었다. 그래봤자,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유의 혼이겠지만. 친구를 만나거나, 서점에 가거나, 영화관을 가거나, 다시 학교로 가는. 그 흔한 한강 구경은 할 수 조차 없는, 바늘 입추의 여지가 없던 시간표. 여자를 보고 싶은 마음. 그런 입추의 여지가 없는 곳에서도 만날 수 있는 문학평론가 김현의 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유출이 있었다. 순열로 보면, 나는 분명 기독교 문화권에서나 에이급 전범이었다. 순식간에 세속적인 카테고리에서는 능지를 당하는 처지였었다. 그런데도, 한강에 눈이 내리면, 나는 궁녀들이 춤을 추는 인터서브젝티비티를 느꼈고, 한남대교를 건널 때는 나의 문인들과 시민들이 바깥에서 잠시 피해들어온 것으로 연상을 했었다. 나는 늘 언제나 나의 백두산 천지의 물을 옆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먹여주고, 물에 빠뜨리고, 인터랩핑, 그러니까 서로 웃고 했었다. 어떠한 점원을 만나도, 태도가 하이루 방가방가 했었다. 그것의 조개는, 그것의 관족은, 조선시대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삼천미터 높이의 빌딩이 있는 것과 같았다. 나는 늘 짜증이 났다. 김현의 딸과 같은 훌륭한 처자를 소개 받지 못하면, 연예인 몇몇이라도 얼른 미팅을 해주어야 한다고........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본디오 빌딩류의 건물들이 제한적 시지각 속에서 다만 한자 儒처럼만 보일 때.......

 

 

 

 

 

*

 

 

 

나는 아무도 없는 서해에 이르러, 탄도항 소리를 들은 것일 것이다.

 

 

 

 

*

 

 

 

 

서울의 포스트모데르네, 그러니까 기독교 청년들은 올드보이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의 내용이 숱한 새로움으로 일순위가 되었다가 이순위가 되었다가, 심지어는 순위에서도 멀어졌다가도, 당구장에서 자장면과 만두를 먹다가 시비가 붙고 서로 싸우고 지랄인 경우를 맞이하게 되면, 단번에 좌청룡 우백호 하는 백제 단계의 주문을 외우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올드보이가 잘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었지 않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도 생각한다. 힐러가 약간 보충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군산 앞바다에 떠 있는 ost는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조선의 관족이 기독교에서 문학쪽으로 하루하루 열려 있는 훌륭한 포스트모데르네 같은 경우에는, 없지 않아 성경에 표현된 골리앗의 느낌마저 줄 것으로 여겨진다. 기독교는 음산한가? 그렇다면 문학도 음산하다. 기독교가 훌륭한가? 그러면 문장조차 훌륭한 것이다. 그것을 언급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에 몇 사람 되지 않는다. 대표자는 당연 자끄 데리다인데, 너무 말이 많고, 문장에 미덕이 없다. 문장에 미덕이 없다는 것은, 다름 아닌 데리다에게는 지나친 모순이 될 것이다. 기독교가 미치지 않고도 안주하는가? 문학을 보라. 사도 바울의 말처럼, 방언만 일삼다가, 거기서 졸업하는 것이 아닌가? 배트가 없고, 글러브가 없고, 사회인 의식이 없으면, 자치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긴 나무와, 아주 작은 나무. 그것이야 다 있지 않은가? 그러나 수학이란 기초 상수가, 플러스 마이너스에 의해서 늘 유동하고, 그것은 방정식을 넘어서는 대수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배트가 있고, 사회인이 있고, 심지어는 마구마구 프로야구가 있다고 해도, 마침내 그것의 뇌가 갑신정변에서의 사람들처럼 방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방언이란 기독교이다. 

 

 

 

 

우리가 올드보이를 보는 것은, 어떠한 어쩔 수 없는 학원 교과서로서. 방언 이전으로 눈이 내리는 기독교에 대한 한국어적 느낌 같은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은 조심스럽고, 피아노의 화성은 유키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