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꿈은 언제나 간주간적이다. 영원하지만 모데르네 하는 영화적 성격.......
나는 꿈을 자주 언급하지 않는다. 이미, 근대 이미, 너무 많은 전선들이 끼어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세부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클래시컬한 저지먼트가 별로 없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은 적어도 오성홍기를 두르고 죽어가는 중에, 단 한 별도 채우지 못하고 체력이 방전되는 것이다. 일은 클래시컬하다. 그와 같은 모데르네 중에 모데르네가 없다. 또한 티비조차 클래시컬하다. 아르떼티비는 완전 클래시컬하다. 하루 종일 클래식 음악이 나온다. 천재인 경우에는 하나도 빠짐 없이 볼 것이고, 우리나라 음악마저도, 빠짐 없이 볼 것이다. 엔진이란 무엇인가? 어디든 갈 수 있는 힘찬 힘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 그것의 한없이 차가운 빙벽. 그러니 보라. 사람들은 차갑게 가는 것이다. 오늘도 텅텅, 차갑게, 내일도 텅텅, 차갑게, 순간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시나이, 아시이, 다만 케이조쿠 아소다로.....
그래서 내 꿈이 앞 뒤의 후리데스티네이션과 꽉 짜여져 있다고 해서 두려운 일은 아닌 것이다. 다만 작가적 자존심이 있어서, 슬픈 꿈이 있었대도 언급을 하지 않는 편이다. 꿈만 꿨다 하면, 몸을 주는 여자는, 내가 꿈 이야기를 하려 하면, 대뜸 너는 그것이 습관이다?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딘가를 가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도, 자동차의 설계 디자인은 천명지위성처럼도 보인다. 몸을 누이고 달려가는 퀘스천 마크 한 백 개 정도.........
비행기가 발군이다. 혼다는 상표 디자인이 이문열의 시인과 도둑에서의 도둑 같다........
아무튼 꿈을 도리어 높여서, 이야기를 만들어 주면 다음과 같다.
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것의 긴장은 너버스 수준에 있다. 아이 퓔에 형용사형을 붙여서 아주 맛깔나게 표현한다. 아이 엠 정도로 그치지 않는 것이 신기한, 약간은 훌륭한. 게르마늄이나, 국어 문법에서의 체언은 멀리 한다. 아이 퓔은 형용사형을 받아들이고, 선대하며, 그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패스시켜 준다. 아이 퓔 해피 같은. 아이 퓔 너버스는 조금 시험이 많이 든다. 그러나, 삼세계의 자연발생적 영문학자가 그렇게 아무렇게나 한국인 신분으로서 일본인에게 즉흥을 한다고 해서 까탈스럽게 굴 수 있는 애덤 스미스 보이지 않는 눈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의식주가 평탄하지가 않다. 그리고 가족 중에 누군가가 풍요로운 우리나라 국가적 인정의 바깥에서 북한처럼 노동을 많이 하고 있다. 나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따뜻한 경제적이며 문학적이고 수준 높은 페치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꿈 속에서의 나는 몰락한 러시아 귀족처럼 그래도 여기저기 만남을 이어나가고 있고, 그들의 객관성을 연명시켜준다. 나는 주목을 받고 있지 않으나, 나를 그리고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사의 기능을 하고 있다. 내가 아픈 것은 아니나, 병원 출입을 자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태도가 조금 수상했다. 나는 의사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육체적인 원인이었고, 정신적인 이유도 있었다. 어린아이의 단도직입처럼 내가 아플 수도 있다는 경계심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의사가 경제를 사랑의 배터리를 채워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쁜 생각이다. 꿈 속에서 사이클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나, 의사들의 막노동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최적화. 병원에서의 동선 같은. 수술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아서 에너지 낭비가 심했던 것을 좀더 잘 보이게, 조작이 어려워서 머리털이 빠질 것 같았는데, 세미나를 자주 함으로써 기술을 널리 공유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노동 이상의 피로를 느끼나, 옛날보다 확연하게 살아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언덕을 넘는 느낌 같은 것. 그것을 막노동 안에 있는 질적 승화라고 한다면, 훌륭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가족주의로 마음이 곪은 여의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한 두세 군데의 병원을 사람들과 다녔다. 친구 같지는 않았다. 나는 여의사가 있는지 눈이 빠져라고 살폈다. 그러나 나의 그와 같은 모나드는 다른 식으로 변화했다. 집을 대신에 방문하는 운동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제법 잘 살았다. 그 중에는 정형돈을 닮은 사람이 있었다. 얼굴이 눈에 보이는 것은, 나의 가치 판단에 일종의 객관적 벽돌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잘 사는 것에 나는 불만이 없다. 그나마 여러 사람 중에 나도 있었고, 사람들을 반갑게 초대하는 곳 속으로 가서 점심이라도 먹지 않을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기필코 먹어야 점수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의 배고픔인지, 그것의 감각이 선명하지 않다. 대신에 다른 차원에서의 불만이, 나의 심장과 간 같은 속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돌아들어갔는지 모른다. 나는 영이 되었는지 모른다. 다만 나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처럼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신민아가 등장한다. 여기서부터 나는 너버스가 언컴포터블로 되었다가 더 씸퍼티가 되는 것을 느껴야 했다. 다중성이 감지가 되고, 공동체 의식이 느껴지며, 대동세상이 내비치긴 했으나, 자신이 없었다. 자의식의 에세이도 없이, 너무 빨리 여배우가 등장한 것에 좀더 느낌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배우는 추운 가을 날, 혹은 여름 날이래도, 가을이 시작되어 가는 무렵의 인문학적 공황상태. 여름 날에는 사람들이 다들 공부를 등한시 해도 되는 자격증 같은 것을 남발하나, 그 중에는 임진왜란에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처럼 공부를 어마무시하게 한 사람들이 분명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관계. 자기가 했느냐는 것이다. 소월시는 몇 편 되지 않으나, 그것으로 논문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국문학과 학생들의 편법 같은 것. 권법이 아니라, 편법 같은 것. 학교에 도둑떼가 난입하고, 괴물이나 짐승, 그것을 대항해서 편법으로 싸우는. 여배우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이상한 병원이었고, 입구가 색깔 입힌 나무로 이어져 있었다. 카페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병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출입은 없었다. 맞은 편은 진입로가 좀더 위쪽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너머에는 쌍계사 가는 벗꽃길처럼 되어 있었다. 사람의 출입이 없어서 신민아가 누워 있어도 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스타킹을 신고, 적당한 치마를 입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사람을 기다리느라고 잠이 오는 듯 했다. 잠을 잘 곳이 아닌데, 옷을 다 입고 자는 것 자체가 슬퍼 보였다. 우리가 조각의 독재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가장 먼저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잠을 잘 곳이 아닌데, 옷을 다 입고 자는 것이, 잠이 드는 모습이 그렇게도 슬플 수가 없었다. 공부하지 않음을 내게 전가하려는 느낌도 있었다. 그것은 오래된 정원이다. 그러나 옷을 그렇게 잘 입은 것을 보면, 공부의 테두리가 없는 상태에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한 것이었다. 여자들은 무엇인가? 공부는 유치원생처럼 맴돌아도, 옷은 대제학처럼 입고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는 논개처럼 남자와 촉석루에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염력은 그녀를 깨우고자 하였는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수달처럼 누워 있는 그녀에게, 오백원처럼 보이는 동전이 놓여졌다. 그것에는 일팔구오라는 년도가 적혀져 있었다. 그것의 배치는 언밸런스하다. 그래도 천팔백년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누워서 신민아도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가지 않는 내가 눈에 보였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같은 신민아와 같은 누워 있는 자세로 오백원짜리를 가슴에 두고 손을 모으고 죽어 잠이 들고 있었다. 내가 저처럼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가 반성하였다. 신민아의 고통스러운 기다림이 단순한 연민에서 아무 쓸모 없는 나의 영웅적 숭고함에로의 정서적 휩싸임이, 그것에 보탬이 되고 있었다.
*
결론은 하나이다. 내게 여자가 없진 않다는 것........
반성은 최종최후까지 늘 따라오는 것인데, 재벌들도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자기에게 돈이 없진 않다고 말이다.........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스러운 문채원의 몸개그를 인터넷으로 보충하면서 (0) | 2015.01.12 |
---|---|
내가 이런저런 글로써 돈을 많이 받고 살면 (0) | 2015.01.11 |
우선순위란 무엇인가?: 힐러 10회를 중심으로....... (0) | 2015.01.07 |
The essence of woman (0) | 2015.01.03 |
일개인적 무림? 마태복음은 (0) | 2014.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