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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이천십사년 겨울 바끄네 라스트 데이에 가까운 날의 포레와 엘가 이야기.......

by 마음대로다 2014. 12. 29.

이천십사년 겨울 바끄네 라스트 데이에 가까운 날의 포레와 엘가 이야기.......

 

 

 

 

 

 

 

 

언젠가 나는 월간 객석에서 훌륭한 음악 에세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했고, 제목은 포레는 신고전주의인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했었다. 그러나 외면한다. 우리가 티비를 통해서 수많은 미담 사례를 만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미담은 마담. 예스 마담이 다방 마담으로 급전직하하는 것. 그래도 인문학 교육이 훌륭하면, 미담을 미담으로 놓고, 내가 죽을 수 있는 모래시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은 죽음의 미학이다. 그리고 동양 고전의 미담을 일종의 진평대군과 안평대군의 쌍두마차처럼, 내가 좋아하는 열자의 국정원처럼 가지고 있다. 혜경궁 홍씨.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다가, 진평과 안평의 서슬 퍼런 군사독재의 시기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식의 도움으로서의 존재의 이항 대립 관계를 설정한다고 할 때, 문장과 음악이라는 것은 아마추어리즘의 절정이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장은 문장일 뿐, 음악이 아니며, 음악은 음악일 뿐 또한 문장이 아니다. 그러나 노래는 날개를 싣고 하는 우리들의 시청각적 관성으로 보자면, 둘은 유럽 연합처럼 연합하는 것 같다. 영국과 연합처럼, 서로 사이가 약간 삐걱거리는 정도.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하겠다고 했던 쇼는, 미국 영화 어딘가에서처럼, 어린아이가 다른 데에 숨어 있어서 죽음의 보고가 사실 교정이 되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우리가 문장과 음악을 두고 비교하려고 하면, 무도회장에서 천상지희 네 명의 춤꾼이자 보컬들 사이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맥주 마시고 하는 것 같은 통제 불능의 몽 생 미쉘 성당 같은 것이다. 언어의 즉자는 진평대군의 열자의 국정원처럼 불만이 없다. 다만 인피니트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음악의 즉자도 마찬가지이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맥주의 크림을 어떻게 처리할 지가 늘 궁금하다. 땀에는 짠 맛이 있다고 한다. 언어는 글을 쓰다가 오한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음악은, 연주는, 그렇게 따지면 연극도 그렇겠지만, 그나마 성불한 사람답게 불꽃이 있다 하겠다. 정글의 법칙에서처럼, 파이어 파이터 몇몇 사람같이. 그렇게 연주를 하면, 사실 맥주가 맥주를 들이킨다고 해도 될 정도의 동일율이 되는 것이다. 독재에 불만이 없고, 수능에 불만이 없다. 드라마에 불만이 없고, 서울에 불만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마지막 달란트. 탤런트가 달란트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들어도 들어도 이상한 말의 장난. 어쩌면 알카포네가 성질을 못이기고, 또다시 밀주를 담그고, 총기를 난사하고, 시민 케인이 다시금 워오브더월즈를 라디오에서 방송 사고를 일으킬 무렵의 대리석 건물들. 계단들. 거기를 바삐 오르내리는 첼로 케이스. 함께 들어주는 콘트라베이스. 그것의 마지막. 일본어로서의 우고꾸나. 사라지다는 의미에서의 우츠크시이. 그러니 음악에는 언어가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발라드의 차원으로 내려가서, 엑시드 위아래위위아래 하는 노래만큼 많이 내려와야, 그나마 가사의 히팅 포인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이란, 특히 클래시컬 오케스트랄 뮤직이라는 것은, 쓸 수가 없는 전선 같은 것이다. 전선은 분명 전류의 p에서 q로의 효과인 것이다. 전기고문이라는 것은 그래서 매우 논리적인 것이다. 매우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수많은 연주자들을 상대로 지휘자가 악기도 없이 그러면 나는 지휘를 할래 하는 것 같은 극단의 말과 사물의 관계인 것이다. 공격과 방어가 영광의 백수 앞바다에서처럼 세미콘덕트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 사람으로서, 학생들을 음악으로 보내는 것은, 어둠 깊은 그곳의 절벽에서 풀뿌리라도 잡으려는 그노시스라고 할 수 있다. 연주자는 착하다는 것. 음악은 거룩하고, 고결하다는 것. 그것의 철벽 방어는 연주 그 자체처럼 장엄하다는 것. 단자로서, 스스로의 모나드를 때리면 되는 것의 현존재. 그런데 그것이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문장은 이백이 될 수 있고, 백이었다가 이백. 그것의 단위는 원. 이순신 장군에서, 이순신 장군으로. 그것의 클래시컬한 동선. 문방구. 과자나 아이스크림. 포레의 레퀴엠 속에서의 도미네. 문장은 눈 앞의 오야붕에 목적도 없이 포경수술을 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우리나라가 가난하니까 두보가 읽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소동파가 그나마 엿보인다 하겠다. 이백은 백원에서 이백원이 되었다는 현재형. 그나마 바쇼의 하이쿠가 나은 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누룩을 만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가난에 아부하지 않는 문학 정신 때문이다. 말 그대로 사무라이가 보인다. 하이쿠가 일본 문학일 수 있는 것은, 일본이 전범 국가라는 것과 어느 정도 싸이멀테니어스하다.

 

 

나는 힐러 잠깐 보다가, 마가렛 대처가 목소리가 그렇게 잠기고 주자를 꼬드기는 슬픈 목소리인 줄 몰랐다. 어렸을 때 들었을 때는, 왠지 꽉 막힌 그러나 카랑카랑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톡쇼에서 말하는 것은 처음 들은 셈인 것이다. 어떻게 영국은 마가렛 대처 이후로 기울었는가? 그것은 오랫동안의 노동당 집권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대처가 현명하게 대처한 것이겠지만, 경제학적 마인드의 천재가 문장의 킵더체인지의 연속과 음악의 가브리엘 포레의 폭격 안에서 탄생하고 동시에 생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레퀴엠의 하일라이트에 올라타면서 말하자면, 어째, 우째.........

 

 

 

 

우리나라든, 영국의 저명한 음악 잡지이든 간에, 가브리엘 포레는 신고전주의인가 하는 제목을 가지고 글을 쓸 수가 없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려면, 마가렛 대처처럼 예쁜 일본 여자를 알아서, 그날 하루, 성리학이 깨지지 않는 관계를 맺은 뒤에, 기쁜 마음에, 여자는 잠재우고, 호텔에서 노트북에 에세이를 작성하는 것으로나 가능할 것이다. 문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전기가. 그것의 카테고리와, 그것의 사당역을 바로 지난 것으로서의 총신대가........

 

 

 

 

문장에 잠기고, 잡지에 잠기고, 끊임없는 음악적 쥐도- 섹스리스니스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으로는 그와 같은 네오클레시시즘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문장에 잠기는 것은 그나마 의원급이고, 잡지에 잠기는 것은 장관급이며, 끊임없는 음악적 그것에 잠기는 것은 밤의 대통령이라는 표현에 준하는 것이다. 돈이 있으면 돈에 부유하고, 권력이 있으면 권력에 바쁘며, 매무새가 좋은 이성이 가까이 있어 이터널하게 오브엑트하게끔 하면 정말이지 요원한 것이다. 이미 자기들에게 있다 하면서, 방관하고, 관방성하고, 씨씨티비하고, 하다 보면 그것의 알 수 없는 영화. 그것의 알 수 없는 지식성. 점점 더 드러나는 주소지 불분명의 너울 현상........

 

 

어린아이의 기저귀의 치우지 않음이라는 표현은 너무한 것이라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