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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중국은 어째서 크고, 북경은 어째서 북쪽에 있으며, 한국은 작은가?에 관하여

by 마음대로다 2014. 12. 16.

중국은 어째서 크고, 북경은 어째서 북쪽에 있으며, 한국은 작은가?에 관하여

 

 

 

 

 

 

 

 

서울에는 눈이 내리는가? 이런 식의 외국식 한국어는 매우 막강하다 여겨진다. 우리는 어려서 사군자를 연습하고, 눈으로라도 연습하고,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눈싸움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치를 많이 보며, 눈치를 많이 보고 살고, 눈치로 흥한 자 눈치로 망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높고 습하며 차가운 곳에 내린 눈은 겨울이 다 지나도록 그 누구도 눈치우지 않을 것이다. 눈의 있음은 정말이지 현란 그 자체이다. 내가 만일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가는 페리선에서 눈을 보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현란무답제라는 말을 내뱉을 것이다. 일본 애니인데, 눈을 우리가 모두 보는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 혹은 차원에서, 영어로 디멘젼, 형용사형은 디멘죠날, 그것은 마치 있음의 눈으로 있는 것 같으다. 제목이 너무 좋아서, 보고 싶기도 하지만, 우리의 뇌는 어쩔 수 없이 크샤트리아가 있다. 그것에 흥분하며, 진일보하며, 반성지를 유발하는 사람이 있고, 흥이 떨어지고, 갑자기 멈추는 것 같으며, 임금 계산에서 빠지는 시간에 맨홀되는 느낌을 갖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 중국은 어째서 큰가? 내려서 반드시 쌓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곤란을 주고, 빙판길을 주며, 염화칼슘으로나 물리쳐지는 도로 위의 악당으로만 기능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는가? 우리나라 산에 내리면 좋을 것이다. 산에 내려서 동물들이 죽는 것은 차후의 문제일 것이다. 그것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리선에서, 내리는 눈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어떤 느낌일까? 우리가 반도 사람이래서 모두 반도체일 수 있겠는가? 그런 간지, 고노 코토바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리는 족족, 누군가의 개그 동작처럼, 쭉쭉 쭉쭉, 소리도 없이 녹아버리는 것이다. 아주 추운 겨울 날에는, 눈의 형들이 바다까지 얼게 해서, 언 바다 위로 눈이 내릴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만일 눈이, 다만 작은 눈이 아니라, 사람의 아바타 같은 것이라면, 아바타는 인도의 신이라고는 하나, 사람의 지구 상의 숫자보다 많은 것들이 바다를 만나 죽는 것이라는 서사시가 가능하다 싶다.

 

 

 상해가 북경이었을 수 있다. 지금의 장안이나, 낙양이 그래서 중국의 수도였던 것이, 중국의 역사가 온통 거짓 투성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아름답다 장안이여, 훌륭하다 낙양이여. 하는 외침이 있었다. 그때는 개봉까지도 높이 사주었고, 중경은 중간에 있어서 훌륭한 중국의 서울이 될 것이다, 남경은 남쪽에 있어서 우주에서 보면 가장 먼저 가장 환하게 가장 화려하게 보일 것이다 하는 축복이 있는 이름 짓기였었다. 일본 사람들은 고토바에 이르러서, 한국을 가장 싫어했고, 그것은 자기들의 생리학 때문이기도 해서, 중국은 한국과 싸워보는 것이 일생 어선의 꿈일 정도였다. 중국이 한국을 능가하려면, 사마천이 궁형을 당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사마천의 글을 읽고, 삼국사기보다 못하다 여기는 것은 삼척동자도 할 줄 아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 어떻게, 이제는 사마천의 글을 버리겠는가? 아니면 보둠어 안겠는가?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와 같은 성층권의 동작이 없는 것이다. 정신적인 불만은, 일종의 귀족주의의 자랑거리였을 것이다. 우리도 이런 식의 불만이 있다 하는. 세계 시민을 향한 메시지. 그러나 실제 사마천이 아니라, 사마천의 존재자들은 모두 궁형을 당한 듯 하다. 삼국사기가 없는 자리에서, 죽은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것이 아니라면, 삼국사기가 읽혀지고, 재빨리 아직 살아 있는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것이라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사마천이 여든이나 일흔의 나이에 있고, 삼국사기가 마흔이나 쉰의 나이에 있는. 사마천이 궁형의 대상이 될 만한 아직 마흔의 나이에 있으려면, 삼국사기는 누군가 삼십대 초에 써야만 하는 것이다. 사마천이 실수로 궁형까지 당할 만한 훌륭한 청년의 나이에 있으려면, 삼국사기는 아직 나이가 두 자리에도 이르지 못한 사람이 써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마치 남경처럼, 중국에서의 궁형 붐이 일본을 열도로 만들었고, 과거사로부터 총기가 자유로운 시대가 되어서, 누군가 남경 대학살의 스릴을 그들에게 흘려보낸 것 같으다. 왜 하필 남경이었을까? 북경은 아니었을까?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려면, 모두 아바타들이 바다에서 빠져 죽는 광경을 보아야 한다. 기차를 타고 만주를 거쳐 북경에 이른다면 덜할 수 있다. 군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흥분했을 수도 있다. 누구도 남의 전쟁, 그러니까 남경에서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외침 같은 것이 마음에서부터 생겼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자의식에 이르기까지 매우 어려운 고비들이 많으나, 때로는 즉문즉설처럼, 한 사람이 그 붉은 죽림의 처참함을 비젼으로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경. 남경. 남의 전쟁. 남의 전쟁. 왜 우리는 남의 전쟁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관서대지진에서처럼, 남경의 중국 귀족들이 일본군의 고위 장교들이거나, 전쟁을 주도하는 핵심 세력이라는 소문이 돈 것이다. 그래서 트집 잡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학살의 광기로까지 나아갔을 수 있다. 거기까지 이르도록, 일번부터 백번에 이르기까지 빠진 숫자가 절반에 가까웠으니, 나름 근대주의의 소황제들이 정신이 나간 것도, 아주 없지 않아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이 없다. 그들은 아주 기초적인 아리스토텔리언적인 발상이 없다. 일본에 있을 때부터 싫었던 기다란 사원의 지붕들이, 자기가 연상하는 것도 싫고, 남이 연상시키는 것도 싫으며, 그래서 한국 사람들을, 특히 기독교인들을 끄집어내어 자기들의 성리학을 중화시키려 애를 썼는지 모른다. 한국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기독교인인 것처럼, 또한 수난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갈 곳이 없었고, 가족도 없고, 도모다치도 없고, 가까운 전우도 없었다. 시끄럽고, 장황하며, 시커멓고, 남경을 약속하지 못하는 아편주의자들의 세상에, 마치 해초가 서역을 여행하는 것처럼, 총과 칼 대포와 트럭으로 도착하고 나니, 자살에 대한 충동이 생기는 것이었다. 아바타. 아바타. 어떻게든지, 북경을 거쳐, 중국에 가고자 하였으나, 별 생각 없이, 큐슈에서 상해가는 배편을 택했다가, 군인들이 변해버린 것이다. 대게의 도덕주의는 다시금 원시를 소환시킨다. 그나마 선자와 악자가 구분된다고 하나, 서로가 촉매가 되어, 그들의 잠재적인 악을 주시하면서, 그보다는 겨우 나은 단계의 심판과 처분을 선호하게 된다.

 

 

 

실제적 공자의 좌표는, 근대주의의 철로길에서, 돌아올 수 없는 사마천의 아뢰야식에 그칠 수가 있다. 전쟁은 전쟁으로서 최고의 두려움이지만, 이런 식의 말도 분명 혼또니 고아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