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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귀학 문학 잡학 철학이 아니라 신학이라고 있기는 있는 것인가?

by 마음대로다 2015. 1. 28.

귀학 문학 잡학 철학이 아니라 신학이라고 있기는 있는 것인가?

 

 

 

 

 

 

 

 

 

학문이라고 있기는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관아를 지나쳐 심부름을 하던 매생이가 문 너머로 보았던 양반의 볼기 같은 것이고, 또한 고문에 관심이 많아서, 양가댁 규수의 주리를 트는 장면을 소리로 전해들은 것만 보아도, 그것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나이가 많고, 돈이 많고, 권력이 많으면, 그들끼리 금세 신사협정을 맺는 것 같으나, 마을 공동 저수지에서 물길을 내는데, 어느 때는 대감댁 아들이 일을 거드는 것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때에, 우리들의 단순한 클래시시즘에 얼굴이 붉혀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은 구멍은, 그러나 사극에서 발견할 수 없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는, 조용한 비리와 담합의 나라. 그것들의 오래된 생각 사 자 사탄의 제국. 그 중에 하나는 소론이고, 그 중에 하나는 노론이다. 다른 하나는 북론이다. 단지 우리는 어느 때에, 오토바이의 알피엠에서, 유학의 찬란한 아침의 봄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하면, 아들의 행동이 늘 마을에서 자랑거리가 되겠는가? 아들은 아들을 낳고, 아들은 훌륭한 처자를 낳는다. 그것들의 확대재생산. 그러나 클래시시즘이라는 것은, 아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진보라는 것은 위화도 회군과 같아서, 말씀 위, 생각 위, 그것의 화용적 적용, 화용적 상태, 화엄사의 있음, 그리고 정현종의 그 섬으로서의 도, 무인도, 유인도, 여서도, 회군은 여기서 이슬람 군대를 뜻한다. 코란을 읽고, 해태 타이거즈의 하니 머스타드 감자칩을 먹고 싶지 않는 사람은 아직 성리학이 성화되지 않는, 아직 성리학이 성립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코란을 읽을 수 없고, 코란을 읽다가, 마음에 감읍이 생기지 않는다. 오직 이슬람 군대 사람들만 호응이 있고, 이슬람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서울에서는 특히 잘 지내는 것이 지금 그들 나라에서는 빅이슈가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갑자기 원유가격이 치솟아 오를 때, 이슬람 사람들 중 몇몇이 의문사를 당하는 일을 사탄의 나라에서는 학수고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원유가 고공행진이 있었음에도, 도리어 이슬람 사람들은 한국에서 잘 지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이승환의 다시금 유희왕 카드로서의 노래, 꽃과 같은 선율, 그리고 멜로디가 아닐까? 내가 그것을 꺼내면, 사람들은 휘닉스를 본다. 휘닉스 파크에서 알바 생활을 하고,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발견하는 불꽃 같은 청춘 드라마를 꿈꾼다. 나는 주자학자이지만, 사람들은 늘 언제나 휘닉스 파크인 것이다. 그것은 물론, 도전 골든벨, 도전천곡, 공부량에 미치면 나보다 승하면 승하고, 쉬고 싶은 마음에 그것만 강조하는 것 같으나, 그것의 경계에 없지 않아 참 주희가 있는 것이다. 대암산 선점에서 낮은 지역에 있는 대대로 전술행진을 할 때가 있었다. 나는 그때 무전기를 매고 있었고,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도로가 살얼음이었다. 그것의 결합을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들 미끄러지지 않고 잘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도래했다. 미끌했고, 나는 갑자기, 파손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충격이라도 줄일 심산으로, 무릎을 접었고, 미끌어지는 속도로 천천히 무릎을 땅에 대었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나는 일종의 신도리코 회장 같은, 사무기 자동화의 선두주자로서, 기계 하나가 금쪽 같이 귀하게 여겨져서 최선을 다한 것 뿐인데, 어쩌면 주변 사람들에게는 비상한 동작의 액션스타로 비쳤던 것 같다. 주자는 다른 차원으로 갈 때에도, 무전기를 등에 매고 간다. 그것은 따뜻하고, 담백하고, 맵시가 있고, 부라보 알파, 여기는 독수리 남면에 있는 여기는 독수정이다. 그들이 주자학까지 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 걷는데, 칭찬이 백 미터 가량이나 계속되었다. 주자학은 그것들로 이뤄져 있다. 귀학. 문학. 잡학. 철학. 우리가 그것들을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최종최후의 카테고리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최종최후의 기신병단, 그녀는 무엇인가? 신학을 하면 알 수가 있다. 조용기 목사는 약간은 귀학에 닿아 있다. 모든 문장은 철학이며, 문학이고, 동시에 신학이다. 설교는 그 모든 것을 한 템포로써 갖고 있다. 그러나 어찌된 연유인지, 귀학으로 서서 앉는다. 나는 문학에 가깝다. 그리고 과정도 문학에 많이 경도되어 있다. 우리 장경동 목사는 잡학에 가깝다. 열자에 잡문이라고 있다. 그것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의 잡학이 오래가고, 인터넷에 도배가 되는 것은, 잡학이라는 힘 때문이기도 하고, 신학이라는 힘 때문이기도 하다. 김문흠 목사는 리틀 조용기, 그러나 귀학이지 않고, 문학에 가깝다. 그래서 묘한 히포스타시스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귀학이 오래되면, 몸은 차가워지고, 뜨거움은 마땅한 다음의 차원을 약속하지 못한다. 때문에 조용기에 익숙해 있는 한국 신도들에게, 그의 문학이 좋아 보이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철학에 가깝다. 사람은 한 가지 매개로 산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방송에 더욱 적합한 것은, 이슈에 잘 그리고 순발력 있게 이동할 줄 아는 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종최후의 카테고리, 어떤 목사 마을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승환의 또 하나의 유희왕 카드 심장병을 대입하면, 알 수 있다. 김용옥에게 이중 매개가 발견되고, 그것이 화성의 진행으로 나아가는 것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이승환의 노래가 우리에게 좀더 가깝고, 김용옥의 사변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취향이나 직업 동아리나 관심사 등의 차이로 분열되어 가가 되고 부가 될 것이다. 분명 대중 가요보다, 철학자의 책을 구입하여, 일종의 제로 라이트의 서재에 그것을 있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생적인 한국학자라면, 둘을 싸우게 하지 않을 것이다. 신학이라면, 정말이지, 구례에 있는 지명의 이름이기도 하고, 어제 들렀던 구절초 단지의 안쪽 절벽의 풍경 같은 것이다. 서양에서 귀학을 전공하고, 서양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서양에서 잡학을 전공하고, 서양에서 철학을 전공한 사람의 땅.콩.회.항. 같은 것. 신학이 있는 것일까? 정녕, 이 나라에 신학이 있는 것인가? 안병무를 보라. 가장 먼저, 가난에 아부한 죄로 인해서 문화혁명 당시에 사형 당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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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연, 우리에게는 발라드 밖에 없다. 그리고 기적처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모든 朱子처럼 내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