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자대자적인 생명의 위협은 지식의 내적 발전에 기여하는가? 대만 심사의 조이맥스 삼백을 두고
오토바이는 묘한 데가 있다. 어쩌면 고려대학교의 심볼은 고양이가 아닌가 한다. 묘권. 고양이 주먹을 쥐고, 야옹 소리를 서로 피를 튀기면서 반복해서 내는. 만화적 상고시대.....
오토바이는 지식에 닿아 있다. 그것은 정말 거대한 트릭이다. 운전사가 운전 기사로 불리는 것은 이유가 있는 듯 하다. 지금은 덜해졌지만. 그것의 풍요. 그것의 제복. 박정권의 시대는, 핏빛의 콘트라스트처럼, 그것은 삼미터 높이의 클래식. 덩크슛할 때만 손에 잡히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나 국문학과를 가면 손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러나 다시금 그것도 삼미터를 오르는. 그래서 가면, 짜증나고, 점심 시간에는 배가 고프고, 무엇을 공부했는지 모르게 오후는 도둑 같이 오고. 내가 가는 길에 항아리처럼 예쁜 치마를 입은 여교수가, 누군지 아직도 잘 모르는, 내가 가는 길을 먼저 가고 있는. 백낙청은 수업을 듣지 못했고,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고, 민은경은 나를 유혹하는 모나드로 수업적인 결여를 채우고 있었고, 소광희 교수는 자기가 나처럼 철학과에 대학원 입시 시험을 본다면서 백제의 움직이는 섬 위에서의 연극을 펼쳐보였었다. 나는 시험을 볼 때, 네 번 보았지만, 보이는 적을 모두 두들겨 팼다. 아주 작살을 냈다. 묘하게 어려운 것들이 있었고, 본문을 알아맞히는 기상천외한 것은 한 개나 맞췄을까? 두세 개 정도 나왔던 것 같은데, 기출문제에서는 다섯여섯 개였으나, 개인적인 안도의 한숨으로는 자칫 그나마 때가 되면 자기도 이성적일 수 있다는 제스쳐처럼 내게는 안비보, 슬프지 않는 소식처럼 접해졌다. 시험에서 미학적 우위를 과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정확한 답변만도 할 수 없다. 사람의 기억은, 장헤진과 소찬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임기응변. 그것의 순발력. 순발력이라는 말은 티비 대중들이 쓰는 말로서, 내가 차용하는 것이고, 배경음악의 줄임말인 브금은 인터넷 매니아들이 쓰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적합하다면서 인사동에서 기념품을 사는 기분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순발력은 서울대학교 교정 어디에서도 필요하지가 않다. 그것은 어째서일까? 영어의 근원이 알파벳. 수박을 먹다가 씨를 벳. 혹은 에이비씨디이에프지. 영화나 화보 사진들을 씨디로 구해주면서, 기숙사 친구가 얘 예쁘지. 괜찮네. 오렌지 캬라멜. 너무 예쁘다. 그것은 서울 사람들만 가능한 문화적 저변이다. 광주에서 운동권 하고 있거나, 지방에서 올라온 생활에서부터의 불만이 시위로써 표출되는 국정원의 학생들 분류 자료에 가장 앞에 그 시절에 사진 찍혀 있었던 사람들은 욕하는 것을 민중의 것으로 알았고, 기층, 솔직함, 반독재 투쟁, 반섹스, 반스포츠, 반스피드, 그러나 쌍끌이나 저인망에 포섭되고 마는. 나는 에스이에스 같았다. 섹스. 기억이 없는. 없으니까 기억이 없겠지만. 폴리탄들의 갈 곳 없는 터미널이나, 버스 승강장, 유치장의 양복 입고 자는 것이 한 달에 열흘이고, 바깥에서 불침번으로 책상에 엎드려 자는 순경으로 있는 것이 나머지 열흘이며, 다른 나머지 열흘은 세계의 비참 같은 학습과 문화의 다람쥐 쳇바퀴를 도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 대학로를 가면, 유치장 냄새도 나고, 경찰 냄새도 나며, 페트롤카, 서울 예대 연극학과 선배가 학생들을 강당에 불러모으고 문을 닫는 기분이 여실하다. 제로 문학. 다른 것으로는 어떠한 나무 가지, 노아의 방주에서 노아와 세 아들이 혹시 뭍이 드러난 곳이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날려보았다는 새를 보면, 아무 것도 물어오는 것이 없는 것이다. 지하철 일호선이 대히트를 치고, 광화문연가가 그나마 가장 성리학적으로 접근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 시절에 오렌지 캬라멜을 좋아할 수도 없었고, 사람은 수십 겹의 옷을 입고 있어서, 그래서 박차고 나와서 에이치오티나 여타 다른 노래하는 사람들이 히트를 쳤는지 모른다. 그들은 나를 보면서 한 번도 욕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고, 자기 존재의 침을 담아서, 가끔 인사로나 장난치면서 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도무지 들은 적이 없고, 그 말투 걸고, 사투리와 욕을 반쯤 쓰는 전라도 출신 신학과 선후배 관계에서, 사상은 무장되어 있는데, 다시 말하지만 성경을 오렌지 캬라멜 카라 시크릿이 다 사랑스러우나 그 중에 제일은 오렌지 캬라멜이라고 하는 사람처럼, 서로의 수십겹들은 오해를 살 만했던 것이다. 개인적인 형식적 찌질함의. 미학적 일치점은. 혼성 듀오 비쥬였었다. 히트곡이 두 세 개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비쥬 노래만 들을 때마다, 눈은 얼굴 용 자 처럼 양 옆으로 내려가고, 그렇지 않아도 그런데, 인중은 길어지고, 입에서는 웅~ 하는 소리가 났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플라타너스. 군산에만, 팔월의 크리스마스에서처럼 유명한 것이 아니라, 관악구청에서 봄철에 플라타너스 가지를 자르는 것을 아주 중요한 일로 여길 만큼 아주 길고 우람하게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는 길의 가로수가 유명하다. 그것의 빛의 산란은, 서울대 캠퍼스와도 공교롭게도 연결된다. 냄새는 걸죽하고, 생기 넘치고, 어딘지 모르게 서울의 매연이 일 퍼센트는 있는 듯한. 광주의 생기에 비하면 늘 그만큼 미치지 못하는. 강원도는 너무 전문적이고. 경상도 쪽은 태백산맥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고. 우리는 영산강을 한 번 보고, 위로는 금강이나 볼까 말까 하는데, 수학여행 버스를 타고 강원도에서 경주를 내려가는 길에서, 틈만 나면 강이건 하천을 본 것 같은. 배고픔이 물마심으로 대치되는 상상의 경계에서, 목이 말라 죽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나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여자가 그렇게 좋았고, 여자만 보였고, 영화의 좋은 것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선반에 놓여진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동국대 영연과나 연세대, 서강대, 서울대학교가, 존재와 감각의 비대상성으로다가, 하루하루 소리나지 않게 폭로되는 것 같았다. 불문과 여학생이 아주 늘씬했다. 옆에 누군가가 불문과 학생이라고 했다. 내 눈에 들어왔고, 입는 옷도 내 맘에 들었다. 걸음걸이가 컴퍼스 같았고, 초겨울에 가벼운 무스탕을 걸치고는 작은 가방을 양 어깨로 매고 가는 모습이 아주 영원한 죽음 같았다. 그런데 이 개새끼 같은 서울대 영문학과는 네 번이나 떨어뜨린 것이다.
이번 대만 삼양사의 조이맥스 삼백은 아주 클래시컬하다. 그것의 백색의 하모니는, 보이져 시리즈부터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동반 상승의 플라시보 효과를, 나처럼 좋아하는지 안하는지 잘 모르겠는 사람에게도 트럼펫과 플라타너스의 가로수를 달리는 참 서울 학생 같은 느낌이 있다. 그것의 주변적 화소. 고등학생들. 관악구 사람들. 젊은 직장인들. 아주 오랜 만에 그곳 근처의 장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맛있게 쇠고기 국밥을 먹었던 음식점들. 삶이 재산에 얽매이는 것이면, 우리 조이맥스 삼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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