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불후2, 세시봉1편: 서울 이야기. 그것의 대학촌 같은 소멸 타임......
'어제 내린 비'를 벅스를 통해서, 박강성과 위일청, 그리고 윤형주의 노래로 게속해서 듣고 있다. 박화요비의 옛날 앨범 중에 하나도 듣고 있다. 불교에 게송이라고 있다. 나는 게송을 참 좋아한다. 접한 것은 남회근이라는 학자의 금강경 강의에서였지만.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앉는 자리가 아니었을까? 사람들을 앉혀주는, 너무 나락해지지 않은, 힘이 다소 없지만 멜랑콜리한 템포는 유지하고 있는 공원의 벤치. 금강경을 두고 단정한 말을 하는 것이 나는 좋았다. 그것은 우리주의였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 좋아서 그랬던 것일까? 정말로 좋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주역 강의가 좋았다. 주역 강의에는 게송이 없었다. 게송은, 메인 디쉬는 맛이 없는데, 디저트가 맛있는 꼴이다. 우리는 전라도 음식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땀을 뻘뻘 흘리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고, 전대생들이 오늘도 들불 야학을 행하는. 그래서 나는 '무정'의 한 대목을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읽을 때에, 주인공 두 남녀가 불난 집을 합력해서 끄는 장면. 그것이 이질적이지 않고, 책장을 넘기는 듯 했다. 그리고 내 나중의 '음악헌정'이라는 글에서 부활한다...... 처음은 비극적이었고, 나중은 해피엔딩이다......
우리는 최고의 양명학을 갖고 있다. 양명학은 그것의 헐거운 빈 집 이론 같은 것이, 양명이라는 이름 하나만을 갖고 빛을 발한다. 그것은 양구를 가리킨다고 해도 아무런 차별이 없다. 내용과 재산, 형식 마저도 식민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배신하며, 국가를 저바리는 한 인생으로 넘어가는 고작해야 핑계거리가 될 수 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주자학적 의지와 기교,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치양지 뿐이다. 주자학의 핵심은 바로 치양지이다. 주자어류는 세상 모든 어류 중에 참 어류이다. 그러나 주자학에서부터, 학문적인 테리토리가 그려지지 않듯이. 조선이 마치, 미친 척 하고, 성리학을, 주희를 그 모든 학문적 운동의 근거로 삼은 것이, 오직 의지 뿐인, 다만 설치미술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이렇게도 비유될 수 있다. 모두 저마다 결손 가정을 갖고 있고, 마음은 명랑하며, 국영수 중에 적어도 하나는 잘하는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빛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도시락이라는 것은 매우 복잡한 결과이다. 어머니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고 하고, 아들은 괜찮다고 하면서, 내용이 없어 힘이 없는, 그것은 매우 당연한, 문턱을 넘는 형식을 구사한다. 친구 도시락을 조금 먹어야 하는 것인가 귀찮도 하고, 그냥 미친 척 하고, 조선시대의 학문 경향처럼, 두 숫깔 정도 할까 생각도 한다. 그러나 그 날은 신비로운 날인 것이다. 유난히 쉬는 시간에 도시락 까먹는 아이들이 없다 했는데, 가진 자의 무리들이 정답게 밥을 먹는 것을 지켜보는 아웃사이더끼리 누구도 도시락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다. 일어서는 포즈. 그것은 한 존재. 그 옛날 검정색 교복으로. 괜히 노트 정리 하는. 도시락이 없느냐고 대놓고 물어보는, 나중에 회사 사장이 되는 아무개. 그 열 몇 명이 단 한 사람도 도시락을 싸오지 않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주자어류를 보면, 바로 이런 양명학 같다. 거의 모든 대목이, 도덕적인 올림푸스가 있지 않고, 그래도 이것은 위대한 고전이라는 우리끼리의 레드썬만 가득하다.
서울은 가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광주와 다를 바 없다. 내 어렸을 때, 사람들이 작은 방에 가득 살아서, 철이 다른 옷을 정리하는 장롱 하나, 이불을 넣는 장롱 하나, 자주 쓰는 이불은 부엌 위로 있던 벽장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자주 입고 벗는 옷은 벽에 옷걸이를 설치해서 외투 같은 것도 걸어두었는데, 먼지는 바깥에 많다 하지만, 한쪽 옷걸이에는 넓은 천을 드리우기도 했었다. 아무개 시인이 신발을 두고 시를 썼다면, 뒤늦게 내가, 오늘 윤형주 김세환 편을 보고,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시를 짓는다. 옷은 제법 비싼 모직 코트에서부터, 대학생의 야상까지 다양한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추위에 재미 같은 것인가? 대학생이 야상만 입어도, 뭔가 로맨틱 했었다. 그리고 동시에 군자 같았다. 히피?도 같았다. 함부로 군복을 입고 있기 때문에. 한끼는 기본으로 굶고, 막걸리를 마시면 따로 밥을 먹지 않는 패턴은 상당한 저변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정신은 자유로운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이름만 서울 사람의, 거의 무된 상태의 반영이었던 것일까? 그래도 독서가 가능하다는 주자학적 의지의 소산이었을까? 박정희가 나타나서 공부를 못하게 했고, 전두환이 나타나서 또한 공부를 못하게 했다. 그것은 철두철미하게, 학생들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지 않는다는 양명학의 소산이었을까? 아니면 이와 같은 전제 정치 상황에 대한 고통의 의식이 베이스가 되어서나, 그것들은 겨우 읽힐 수가 있다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주자학적 판단이었을까? 사물이 하나 생기면, 존재와 무는 더욱 멀어진다. 사물이 하나 더 생기고, 그것들끼리 경쟁하면, 헤겔이 철학의 기초는 개념의 운동이라고 했는데, 한낱 사물들끼리 경쟁하는 세계에 던져지고 만다. 하이데거의 음각적인 기투성. 게보르펜하이트? 그것은 어쩌면 이리도, 최근에 눈이 빠져라 아름답다고 발견하게 된, 베엠베의 엠쓰리 같은 지 모르겠다. 그 소음. 정말 그 아름다운 소음.......
무의 아름다운 연장에서, 아버지는 소설이나 순정만화의 인격처럼 그려졌다. 옷이 나란히 걸려져 있는 것이 고전과 같고, 그것을 덮는 보다 깨끗하게 관리하려는 기술과 전통이 양명학이다고 아들에게 진리와 지혜를 전수하는......
뮤지컬은 참 슬픈 생기인 것 같다. 나는 그들을 뮤시했는데, 오늘 짧은 두 뮤지컬의 대결을 보고는, 아니구나, 아주 그 정도는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접게 되었다.
서울은.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부와 산모 이야기 (0) | 2012.09.25 |
---|---|
새누리당 서울대학교 세종시 이전 대선 공약을 그림 그리면서 (0) | 2012.09.24 |
모자람의 근원: 김주현의 모짜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앨범을 배경으로 (0) | 2012.09.20 |
즉자대자적인 생명의 위협은 지식의 내적 발전에 기여하는가? 대만 심사의 조이맥스 삼백을 두고 (0) | 2012.09.18 |
오늘 나가수 비조 경연을 보고, 연상되는 작은 슬픔은 (0) | 2012.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