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이야기

일본 문학의 관성과 한국 정신의 우중충함의 오래된 상관 관계에 관하여

by 마음대로다 2015. 3. 3.

일본 문학의 관성과 한국 정신의 우중충함의 오래된 상관 관계에 관하여

 

 

 

 

 

 

 

 

일본은 매력적이다. 매력이란 말은 일본에서 유래했다. 조선은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말인 것 같다. 일본이, 도리어 우리의 고조선인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만큼 좋은 이름을 이웃나라가 갖고 있다는 것은 좋은 아버지 밑에서 잘 자라고 있는 아들을 내 친구로 두고 있다는 간지나 복지 같은 것이다. 제임스 라스트의 두 음악. 어바이드 미와 차이콥의 로망스. 그 두 개는 강력하다. 로망스는 정말이지 제임스 라스트의 것이 더 라스트 띵 같은 느낌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것은, 클래식이니 전문 클래식 연주자가 연주한 것들은 덕분에 재미가 없다. 그의 연주단의 것은 정말이지, 초고속 유인 우주선으로 만들어진 오토바이 같다. 오직 합성과 섭리로써 질주하며, 가끔 눈동자가 돌아가는 것으로서, 라이더가 인간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듯한. 세종시에 서울대학교를 유치하여서, 이름은 그렇다면 세종대학교가 되는 것인가? 학생들을 위한 고속도로를 만들어서, 시속 이백킬로 전후로 질주하게끔 한다는 교육 자치 이개년? 계획. 그것으로도 얼핏 들어맞는 것 같다. 우리는 헤어진다. 오랜 만에 좋아하던 여학생이 떠올랐고, 어째서 서로 사귀지도 못했던 것일까? 반성도 해보았다. 일단, 예쁨의 수준은 다름이 없는데, 지근거리에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세히 보면 내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의 칼라 오브 머니가 어마어마해서, 아름다운 선승 수준의 사람들은 접근이 어려웠다는 것. 그래도 내가 그 여학생을 좋아했다는 것은 내 친구들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마치 위성 같은. 좋아하는데, 돌아가는. 괴물의 이름으로서의 모노가미. 황금으로 된 중국 사자상. 우리의 태초는 그래서, 코끼리 걸, 소녀 걸로 시작하는지 모른다. 찬송가와 창세기는 너무 관제적이고, 전쟁의 사후 기록적인 느낌이 크다 하겠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소년 소녀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렇다 보면, 너무 소년 소녀가 부풀어올라서, 나중에는 자칫 대지를 덮을 수도 있겠기에,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영문학적인 소년 소녀 문학이라는 것은, 딱히 그런 것도 아니지만, 성경과 신학 신학적인 철학이 완전무결해진 뒤에나 가능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소년과 소녀가 부풀어 오르면, 인간의 가능성은 상당 부분 삭감이 되고 만다. 소크라테스도, 플라톤도, 소크라테스도, 그래서 쇼크에 대한 심리적 생리적 발생에 대한 연구의 산처럼 높은 그림자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쇼크를 받으면, 움직일 수가 없다.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은, 향유와 대지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린피스가 향유 고래를 너무 많이 잡는 바람에, 쇼크를 받는. 그것은 문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유도 아니다. 그렇다고 무는 정말이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울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쇼크가 중요한가? 교육이 중요한가? 교육을 아무리 많이 받아봤자, 쇼크를 받으면 그 사람은 겉모습만 정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쇼크가 중요하다고 해서, 쇼크를 많이 받아봤자, 그런 식의 논리는 듣는 사람을 아주 전기 쇼크하게끔 하는 실제인 것이다. 할 말이 그것 밖에 없다는 것과, 문학적인 제안이 그런 것 밖에 없다는 것이 될 것이다. 애니웨이, 그렇다면 성경은 태초의 쇼크를 덮고 있고, 쇼크를 가리키고 있으며, 쇼크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쇼크가 무서운 학자는 한 발작도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점점더 권력의 무덤 안에서, 쇼크를 대지의 교육이라는 거대모순율에 사람들을 적합하게 만든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그들은 일차 원정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으로 많이 건너갔다. 한국은 춥고, 일본은 조금이라도 따뜻하니까. 그리고 비키니 쇼크 같은 것을 영원한 문학처럼 비너스의 탄생하고 하다보면, 현해탄 같은 거리는 거리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따뜻하고, 아따따이, 그것은 따뜻하다는 말, 그리고 한국 민요 아리랑, 아라리요, 부를 때마다 이제는 지치는. 정신과 노래의 아리랑 고개. 모자란 것들에게는 선처를 하는 것 같으나, 쇼크의 고고학 앞에서는 영원히 한국의 남자를 희생시키고자 하는. 조선에 빠뜨리려고 하는. 어쩌면 이순신이라는 인명은 인명이 아닐 수 있다. 조선이 너무 뜻밖이다보니, 그리고 그것에 대한 연구가 성균관 학자들로부터 누적이 되고, 잘 정리되다 보니,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인명과 지명의 하모니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성립한 것일 수 있다. 사람은, 노력과 성실로써 산다. 그러나, 판단과 재치로써도 사는 것이다. 노력과 성실을 다한 후에, 교복이 끝나고 난 뒤, 사람들에게 판단과 재치를 두루두루 펴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죽은 황진이가 가장 아름다운 육체를 다시 입고, 겨울철 군불에다가 솜이불을 구비구비 펴고자 하겠는가? 노력과 성실을 다한다는 것. 그것은 쇼크 이후에, 다만 노력과 성실을 다하는 것일 수 있고, 노력과 성실을 다한다는 것, 그것은 누군가 자신을 유성룡은 감안하나 조선에 대하여 반쯤 각도를 돌린 이순신이라고 스스로 명명한 것일 수 있다. 조선은 사춘기 소년들에게는 뜻밖이고, 궁녀는 남녀가 유별하고 나면 하룻밤 사이에 경회루의 괴물을 보는 듯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와 같은 기계장치의 하나님은 이해하겠는데, 트랜스페런트, 아니 트랜지언트, 지나가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지명과 인명이 합성이 되는 시간 속에서, 묘하게 포네틱하게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궁녀는, 조선을 모두 해볼 수가 있다. 우리는 모두 태고적의 고조선으로부터도 아프리오리해질 수 있다. 이순신이라는 확고부동한 코드 네임이 넉넉한 내용까지를 확보하고 나니까, 유성룡의 징비록, 그러니까 조선과 궁녀의 상관관계가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난중일기가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품이냐고. 그러나 나는 이렇게 반문할 수가 있다. 막노동의 아프리오리와 아포스테리오리가 확정된 사람이 서울대를 갈 수 있겠느냐고. 그와 같은 문제제기는 향기가 있다. 그러나 불필요한 것이다. 때리고 맞고, 불지르고, 가두고, 먹이고, 약물주사를 주입하고, 공부 안하면 때리고. 그렇게 쇼크만을 잔득 심어준 다음에, 서울대를 간다고 해서 대체 어디를 가겠는가? 그것은 실제 서울대의 영혼이요 그림자가 가리키는 소녀 가수 벤의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오 마이 푸어 소크라테스. 멍이 든 플라톤이 되어봤자, 마음의 콘소넌스는 사회적인 클래식이 하나도 없이, 그저 양지 좋은 곳에 묻히는 것이나 바라지 않겠는가? 일본은 조선이 스스로 바쁜 시간 속에서 빠르게, 조선과 궁녀의 이십사지간이 모자란 원환으로 빠져들어갔다. 누가 조선이라고 이름 붙였지? 하면서 문제 풀이를 하고 있는데, 아침 조 신선할 선 늘 그렇게 뜻을 알고자 하면서 살다가 보니, 일본인들은 가족 중에 한두 명씩은 데리고 있는 가축처럼 조센진으로 만드는 것을 유행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그것이 지금의 후기 산업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이고 심리적으로 상호 소외된 인간의 내면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어차피 남녀가 만나 아이를 낳으려면,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켜야 하는 것이다. 남자가 바깥에 나가 일하면, 여자가 외양간에서 소로 있다가 도축을 당하는. 여자가 적당한 연장으로 남자를 포섭해서, 바깥에 나가 우경화, 그러니까 밭을 갈게 하는. 이순신 장군은 그러니까 후기 산업 자본주의 사회의 전란 속에서 문학적 일기를 쓰신 것이다. 그것이 먼저, 장군의 비늘 같이 등장하여서 징비록일 수 있고, 훗날 유성룡이 읽다보니까 세상에 이처럼 징비, 그러니까 징그럽게 아름다운 글이 있을 수 없다 하여서 징비록일 수 있는 것이다. 난중일기가 즉자라면, 내면적인 접힘. 징비록은 그것을 두고 다른 것과 관계를 맺는다 해서 대자적인 작품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이 매력적인 것은, 처음의 잘 모르는 원죄가 있었다지만, 차츰차츰 가장 좋은 것들이 일본으로 침략을 하여서 그런 것일 수 있다. 우리에게는 금치산자만 많이 남아서, 좋은 것은 있지만 금세 징비록 같은, 개인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높이의 돔구장이 몇 겹이나 되어서 우중충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이순신인 것이고, 그래서 유성룡인 것 같으다. 그렇다고 하면, 제임스 라스트의 두 명곡, 차이콥의 로망스와 찬송가 어바이드 미의 함수가 풀린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지금이라도 그때 좋아했던, 순열에서 밀려나 있던 소녀가 나이가 들어서도, 신비로운 약초를 먹어서 삼십대 초반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보면 지금 남은 자 사상 중에서는 가장 예쁜 얼굴일 것인데, 바로 그것,

 

 

 

 

말을 잇지 못하겠다.

 

 

 

 

열매는 성기와 같다. 그것은 반대도 마찬가지. 얼마나 조선 반도 위에서의 인간의 정신은 의식은 이처럼 끝없는 미지수의 것으로서 가혹한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