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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오랜 만에 야한 영화를 영화관에서 본다는, 낯선 느낌의 순수의 시대(2015)는 욕망이다.

by 마음대로다 2015. 3. 6.

오랜 만에 야한 영화를 영화관에서 본다는,

낯선 느낌의 순수의 시대(2015)는 욕망이다.

 

 

 

 

 

 

 

옛날 서양에는 골(gaul)족이 있었다. 그들은 산포되어 있었고, 로마와 이스라엘 그리스 이집트와 상관이 없었다. 게르만이라던지, 하이두이라던지 하는 민족들은, 실은 대충 지은 이름이다. 지중해를 둘러싼 패권국가들은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주변에 대한 관심은 계획된 게르만이거나 하이두이처럼 갖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이라는 이름은 극복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머리 뒷편에 오래된 이끼처럼 잔존하던, 브로콜리, 골치는 때로는 기존의 문명의 이성적 전체를 장악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만 두려움과 폭력, 섹스와 열정, 야만과 치기, 폭풍과 고요함, 자연과 빛깔에 준하는 형용사류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말과, 비싼 말, 잘생긴 말, 때로는 사람과 적당히 장난도 치는 영물로서의 특정 기사 거웨인의 말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있다가 없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일등 공신이 되는데, 평화시에 권력자끼리 담합하고 매점매석을 할 때는 보이지 않는 바람 같은 사람을 상정해서가 아니다. 시를 잘 짓고, 당대의 석학과 친구이고, 오직 북방의 경계를 지키는 사람으로 있는, 그 바위 같고 높은 산과 구름 같은 사람을 믿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훈족 같은, 훈족의 영웅 아탈리 같은 것이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첫번째라고 일단 생각해줄 수 있는 문명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모순인 것이다. 부정적 계기가 바깥에서부터 밀려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정적 계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가이사르가 로마에 간 것도, 처음에는 용병이라는 신화, 불특정한 관계성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 가이사르가 남의 나라 전쟁, 그러니까 로마 군인에 속해서 죽었다고 해도, 워낙에 비문명은 수구초심, 문명의 섭리 안에서, 초심으로 돌아가 죽는 것이니만큼, 특별히 슬퍼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이사르가 또 나타났다. 한국 사람이 로마에 가서, 이름이 뭐냐고 갑자기 물음을 당하니, 생각한 것이 없다가, 약간은 알 수 없는 오만함, 대뜸 가이사르라고 또 말하고 만 것이다. 이름이 같은 사람은 많다. 그러나 가사문학관, 기축옥사, 알프스를 이상한 방향으로 넘어오는 엄청난 힘의 용병은, 문학적이고, 이름이 죄다 가이사르인 것이다. 그는 안으로도 싸우고, 밖으로도 싸운다. 우리는 가이사르 전쟁기가 거의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진행하는 것을 두고, 혀를 내밀고는 두르게 된다. 여자 이야기도 없고, 전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없다. 전쟁기이니 여자 이야기가 없고, 자기가 잘 아는 것은 특별히 글을 써야 한다는 내부적 분별지가 생기지 않으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지 않나, 뜬금없이 기마대가 나서지 않나, 무기를 모두 버려라고 호통치지 않나, 알 수 없는 나라 말을 하니, 무기를 버리는 희한한 앤서링 머신이 발동하지 않나, 행진 중인 장군 앞에 아이를 데리고 오지 않나, 그것은 예수님,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했던, 나무 조각에 입혀진 채색 그림, 하이두이족의 족장이 자기 동생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나, 브리타니아로 건너가서 왠지 모르게 전쟁은 하지 않고 추수도 하고, 아이도 돌보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을 돌보는 어린아이의 정경만이 펼쳐지는 것이다. 전쟁은 전쟁이 분명하나, 도무지, 어디서부터 전쟁이 아닌 것으로 달바꿈하고, 연기가 시작하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진짜 사나이 여군 편에서, 영점을 잡을 때, 그것은 매섭고 고단하여 카메라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자살 추동이 일어날 만큼 힘이 드는데, 영점 잡을 때만큼은 재밌는. 콧구멍의 점막 상태가 있는 것이다. 영점을 못잡았을 때도 재밌었다. 어차피 군인은 무식한 것이니까. 그러나 영점을 기가 막히고 잡고, 조교들로부터 칭찬을 들을 때는, 앤서링 머신으로서의 서울대나 예일대 교수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보다 기쁨이 넘쳐 흐른다. 그것은 어째서일까? 그 큰 총소리. 애니 해슬렘. 수많은 클래식 송가들. 총소리 총소리 사이로, 화랑과 거북선이. 둘 다 담배 이름이었다는 것. 명량대첩에서 구선이 불에 탈 때의 장관 같은 것. 그리고 솔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그 사이로 팔팔이. 팔팔이. 그것은 너무 우리 사는 현대적이라고 해도. 한강 가서 담배를 피우면, 요즘 담배의 이름 보다도, 팔팔이, 팔팔이. 우리가 영점을 잡을 때 기분이 갑자기 고단함을 모두 사슬 풀어버린 것처럼 기뻤던 것은, 영점을 탄착군을 먼저 잡고, 나중에는 표적지에 정확하게 모이게 했을 때는, 그것을 옆에서 인격과 그림자 처음 만난 조교가 칭찬을 해주었을 때는, 우리는 분명 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 같은 마리화나를 만끽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째서 기쁜지 정확하게 분석심리를 행하지 않고, 기뻐했던 것이다. 질 들뢰즈가 아니라, 콧구멍 들뢰즈. 모든 족속 이름들, 모압 족속, 아모리 족속, 길갈, 블레셋 족속, 셈, 함, 야벳, 그리고 아랍의 한 도시 이름, 아부다비......   

 

국문학은 골족에 가깝다. 지금의 영문학은 그렇다면, 우리나라 골족의 오래된 외교적 결과인 것이다. 잉글랜드라는 말은, 잉골랜드라는 말이고, 글이라는 말은 골은 어느 정도 두껍고 솟은 것이기 때문에, 납작하고 날씬한 것은 글이라고 발음되고 표시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한글은 그것을 도식적으로, 자연스럽게 표기한다. 골을 gol이라고 쓸 수가 없고, 글을 lg 그러니까 gl로 표기할 수가 없다. 그나마 골은 gaul로, 글은 gul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어린아이에게는 복잡한 꼬드김이요, 교육의 아프리오리로써의 골치아픈 일이 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골을 골이라고 쓰고, 글을 글이라고 쓴다. 만일 서양에, 가이사르의 기록처럼, 골족이 있었다면, 글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글로리. 그렇지 않은가? 글로리라는 말이 그 뜻이다. 골족은, 시인 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순장의 숫자이기도 했다. 시인이 열 편의 명시를 남기고 죽으면, 양반과 상민은 스무명 가량이 죽어야 했다. 장편 소설은 없는 것이었다. 백지라는 것은 어딜 가서도 창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이사르의 전쟁기라는 것은, 그것의 분량만 보더라도, 엄청 창피한 것이었고, 그것은 글을 읽어보면 실제적으로 그것의 인칭대명사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겨우 아기가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린아이가 죽은 숫자를 생각해 볼 때, 성경은 어떠한 골족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골족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골족을 인정할 수 없다. 이제는 말할 수 없고, 앞으로도 골족의 존재를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의 철학적 함의를 발견할 수 있다.

 

가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 가서, 푸른 빛의 정신병을 돌보고, 죽음을 자청한 수만의 어린아이들을 구했다는 기록이 그래서 눈물이 겨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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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김소월 청년대가 없는 것이 신기한 것이다. 김소월로 부족하면, 한용운도 붙여주고, 김동인도, 서정주도 붙여줄 수 있다. 영화가 신기한 것은, 맹자의 김소월 청년대에게 붙어 있는 최신식의 현대 도시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소용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 응어리질 뿐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내용의 전개가, 장면마다의 파상풍이 너무 일본 풍이지 않느냐고. 하지만 뫼비우스의 띠를 생각해보라. 골과 일본이라는 말을 하나로 묶어 보라. 그것은

 

 

 

 

고리욘........

 

 

 

 

 

그래서 나만의 마지막 엔딩 크레딧의 배경 음악은, 서지영의 숨은 명곡, 몸살.........

 

서울극장에서 교보문고까지 걸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