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은 갈수록 무시무시해진다. 그것은 성경을 잡아먹고, 조선을 잡아먹는다.
나는 지금 문어가 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모스키토, 그러니까 선언과도 같다. 내 팔을 여름날 세찬 바하처럼, 선언하면서 피 빨아먹고, 날아가는. 존재와 주자는 같은 것인가? 우리가 공부방에서 다트를 날리면, 어느 때는 정통으로 맞기도 한다. 단결. 정통해야 산다. 다트를. 정통으로 맞히면, 우리는 사실 무엇을 정통으로 맞혔는지 빅퀘스천 마크를 빅스쿠터에 스티커 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앙드레 가뇽을 좋아한다. 윤동주가 별헤는 밤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좋아했던 것처럼. 나는 앙드레를 좋아하고, 왠지 모르게 가뇽성을 좋아한다. 사람은 가뇽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엔에스 윤지가 내가 어딜 가려고 하면, 어딜 가뇽? 하지 않겠는가? 그것의 보편화용을 좋아한다. 우리는 오갈 데가 없지만, 버려진 신림역 근처에서, 우리는 새출발을 할 수가 있고, 새멈춤을 할 수가 있다. 멈추는데, 그것이 새 것이라는 역설. 문학은 역설에서 시작하고, 역설로서 꽃이 피고, 근초고왕이 담배값 이천원이나 인상하는 바람에, 미안한 마음으로다가 정동진에서, 표현이 너무 동해 번쩍 서애 유성룡 하는 것 같지만, 죽다 살아난 것처럼, 아무튼 아사달의 역설에 넘치는 힘이 있는 것이 문학인 것이다. 경마장 가는 길 할 때. 문학 경기장. 어쩌면, 기형도가 아사달만 알았더라도, 기형도가 시인 잡편으로 그치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존재와 시간을 정독진했더라도, 그는 살아남아서, 나보다도 멋진 아사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섯 사람으로 전부를 보고는, 그들이 모두, 평행이론으로다가, 일종의 피흘리는 비급 매치, 웃고 떠들고 하다가, 미처 마지막 판도라의 세포를 풀어내지 못하고, 신체까지도 약하여져서 죽은 것 같다. 불쌍한. 파라셀수스. 파라켈수스 아그리빠. 그러니 우리가 티비를 좋아한다는 것.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 대외적인 신문의 사회면을 좋아한다는 것. 그것은 한쪽 면만을 계속해서 보는, 지하철 체험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지하에서는 볼 것도 없고, 지상에서는 한쪽 면만을 보는. 맞은 편에서는, 전지현이 가발 쓴 할아버지 머리에다 토를 하는데, 그것을 못보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여자는 창피하겠는가? 아임쏘쏘리. 외국 말에 그런 표현이 있는 것은, 워낙에 양명학적 실험 속에서, 너무 미안하단 말도 안하고 안듣고 사람들이 죽는 통에, 백 명 죽고 그것이 드디어 표현법에 남은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 두 명 죽고, 내가 문학 속에서 미안. 미안. 다 해먹은 것이 되었지만. 우리는 높은 것이 있고, 높이 있고 싶은 것이다. 스카이 라운지 같은 데에서, 다시금 비싼 호텔을 가지 못하고, 모텔 저층으로 간다고 해도, 폴 모리아 음악을 가득 배경으로 하고는, 스카이 라운지 같은 데에서 대도시의 저녁 야경을 보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우리네 아까운 징비록의 시간이 가까이 오는가? 높고 싶은 사람들의 의지는, 바로 삶과 죽음으로 갈리지 않는다. 낮더라도, 마음과 의지가 높은 삶으로. 높은 것으로, 바로 옆에 죽음이 있더라도. 그렇지를 못하는 것이다. 징비록. 두렵고 떨리지만, 처지와 객관적 사실이 빈약하지만, 논리적 인과가 받쳐주지 않지만, 기형도의 아까운 섬 시들을 보자면, 제법 폴 모리아를 이고 있으면서도 시인 자신의 국정원을 일구지 못한 것에 대한 '하니' 엿보인다고 하겠다. 국문학이란, 시인의 죽음까지도 돌파하는 질주가 있다보니까, 시인이 아무런 사회적 개념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조용필도 노래했던 서울서울서울, 그리고 이용이 노래했던 종로에다 사과 나무를 심어보자, 그런 높은 시인에 비추어보면 저열하고 하급한 가수들조차 나름 훌륭하게 성공했던 거리시, 일본어로 데카이, 그런 것이 없이, 죽은 것이 꼭 독일철학자의 한계상황으로도 정리가 될 것 같다. 나름으로는 삶의 호상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알 수 없는 피냄새는 동시동작적으로다가 바람에 실려 코끝에 진동을 한다. 개념이 훌륭하고, 반면에 시적 편린은 기형도라는 이름에 씽크로나이즈드 스위밍 되는 것이 아니다. 개념은 대부분 시적 편린의 연속이다. 그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만큼 독일 철학자 군들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임진왜란 이후에, 죽지 않고, 다시금 조선을 바라보는 일본군의 영구 혁명주의자였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시적 편린도 아니고, 개념의 운동도 아닌, 조선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이문열이 그렇게도 하지 말자고 암암리에 주장했던, 상위모방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바로 성리학인 것이다. 우리는 징비록을 바른 마음가짐으로 시청할 수가 없다. 그것의 캐즘은 최근 일본 영화 캐산보다도 딱딱하고, 거대한 철선의 앵커 같다. 율곡 이이는 도산서원에 있었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한국의 도자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둘다 과정철학자였기 때문에, 누가 낫다, 누가 저수지의 개들이다, 타타까이, 가타부타 말할 수가 없다. 다만, 데지그네이션이 다르다고는 하나, 성리학, 성리학, 사람들이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이순신, 이순신, 부르짖었던, 김소월마저도 초혼에서 부르짖었던, 이순신, 이순신, 그것은 바로 순천과 화순의 이순신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비슷한 말을 했다. 무등산의 모더니즘의 미학과, 월출산의 야수파적 열정이 하나가 되는 예술사가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탄생할 것이다. 그것이 나란히 함께 있어야 그것을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다. 무등산에 오르고, 그것을 기억했다가 월출산을 보고, 놀라서, 마음으로 하나가 되게 한 다음에, 위대한 시인이자 화가가 탄생한다면, 정말이지 영광스런 자연 왕의 길이 따로 없을 것이다. 김소월의 초혼에서, 내가 부르다가 죽을 이름이여, 이순신. 이순신. 그것은 방파제에서, 수십억짜리 포카를 하다가, 돌아갈 차비만 남기고는 사람들이 덩그라니 떠나가는 풍경과 비슷한 것이다. 마지막에, 액면에도 밀릴 때, 경찰이 들이닥치기를 그렇게도 빌었지만, 그날 따라, 경찰차는 외면하고 지나가기까지 한다. 꿈속에서처럼, 저 멀리서 대기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아래가 구분되지 않는 킹과 퀸이 파도에 밀려, 또한 위아래 넘실대지 않겠는가? 무엇이 개념이고, 무엇이 시적 편린인가? 개념을 익혀야 하는 이유는, 문학이 높이에서 죽지 않기 위한 필승의 해법이기 때문이다. 보다 솔직하게 말하면, 생존의 유일한 방책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묵호항. 그것의. 그것의. 아무런 항구.....
아무런 개념 없이 조선도 성리학에 빠졌고, 더더욱 아무런 개념 없이 일본도 성리학에 빠지고 말았다. 전쟁까지 치렀고, 사람들은 이율곡을 원래 그렇게 부를 요량으로 계획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율곡. 이율곡. 그러나, 별다른 관심도 없었던 이순신이 난중일기를 남기고 순직하자, 세상은 솔직함의 성리학으로 개벽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난중일기를 전세계적인 숱한 정신서적 중에 탑쓰리에 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주자학이, 겨우 주자어류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말따로 행동따로, 형식따로 내용따로, 주자학따로 양명학따로인 것처럼, 거대 양명학의 저서가 주자어류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지독한 가난에 가장 사실과 비사실의 스케일로써 다가간 것이 난중일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리산에 태양이 내리는 것을 보면, 이순신은 매우 어린 시절에 원망을 꿰찼고, 그것의 해방은 글쓰기가 유일하다는 것을 통각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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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은 그것에 정통한 아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사전의 도움이나, 주역의 원조나, 주자학의 공중 정원 등에서 오래 살면서, 사람들이 남는 시간에 철학을 하고자 하면, 흥부의 가난한 이불에 머리를 내민, 그것의 만두들을 양식 삼아 영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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