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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예쁜 극중 오연서의 죽음에 대한 조가: 우리 시대 인문학 교육의 과도한 책무.......

by 마음대로다 2015. 3. 24.

예쁜 극중 오연서의 죽음에 대한 조가: 우리 시대 인문학 교육의 과도한 책무.......

 

 

 

 

 

 

 

 

유난히 예쁘게 나왔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예쁠 때도 예쁘고, 안예쁠 때도 예쁘고, 조견오온개공, 평범할 때도 예쁘고, 앵그리하게 나와도 예쁘고 해야 하는 것이다. 꼭 죽을 때가 되니까 예쁜 것은, 우리의 김우창 심미적 이성론에 심각한 문제가 제기가 되는 것이다. 여자들은 그러하다. 유난히 예쁜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들이 모르는 세계로서, 여자와 함께 지내야 그것을 아는 것이다. 많이 먹으면 예쁘지 않다. 여자들처럼 투정을 많이 부리거나, 남의 흉을 많이 보면 예쁘지 않다. 동희. 그러니까 돈이 많아서, 책도 사고, 음반도 사고, 가방도 사고, 옷도 사고, 어제도 사고, 오늘도 사고, 오늘은 파인애플 주스, 내일은 한번 꼬냑, 도전, 친구들과 클라우드, 그렇게 살아도 굉장히 예쁘다. 여자들은 삶의 회의가 없다. 그렇게 살라면, 살 수가 있다. 그리고 은희. 아무래도 사랑이 있어야 예쁜 것이다. 그것은 앵두를 머금은 입술과도 같아서, 그것의 음표는, 그것의 보이지 않는 아프리오리, 아포스테리오리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며, 심지어는, 심은하,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약간 페이소스, 우스운 것은, 팔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자가 죽은 것이다. 이렇게 언급하는 것은 정말이지 아사달의 경지로서, 어떠한 제도에서도, 양식에서도 건져지는 것이 아니다. 왠지 모르게 가혹하고, 그렇게 리마크된다는 것이, 혹은 디마케이션 된다는 것이. 어쩌면 한석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심은하도 따라 죽을 것 같은 위기 의식 속에서, 그것을 여자 주인공에게는 알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은 실제적인 것이 있고, 안실제적인 것이 있어서, 실제적인 죽음은 사실 교육도 문학도 영화도 무화시키는 파괴력이 있다. 어쩌면 한석규가 죽은 것은 영화의 소재가 그래서였고, 심은하가 죽지 않은 것은 영화가 그래도 어린아이들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같은 생활세계 현상학에서는, 실은 몇 개의 죽음이 중첩이 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처럼 제도가 그를 배신하고, 예수님처럼 제자들이 그를 배신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장자크 루쏘를 배신하는 것이다? 그의 양심론과 사회계약론은 완벽한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요약은 늘 언제나, 거창한 문예사, 철학사, 양심사의 낭비 안에서 겨우 반짝하는 것이다. 문예사가가 되었다 것, 그것은 첼로의 한 선율에도 당해내지 못한 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이 말에 깊은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읽을 때는 재밌게 읽었던 이런저런 예술사들을 두고, 그것이 다만 최종적으로 힘이 없는 것을 두고, 너무 막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로호도. 그러하다. 하지만 기초적인 예술사마저도 야수파에 대한 기억으로 사라지고 나면, 그것의 들라크루아, 우리는 어디쯤에서 삶의 에이매치를 맛볼 수 있겠는가? 송재호가 고소영을 결혼시키면서, 송재호가 갑부이고, 고소영이 뛰어난 사회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 하나 만나지 못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다가, 영광으로 영광스러운 오토바이 질주를 할 줄 안다는 단 하나의 속성에도, 그 남자와 결혼까지를 권하는 것은, 다만 그것이 잠재태와 가능태면에서 빼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태에서도 그처럼 카메라 촬영이 따로 없는 영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로 가본 적이 있다. 친구들과 가본 적이 있다. 불나방처럼 이름 모를 여자와 가본 적이 있다. 음침한 검정색 세단으로 가본 적이 있다. 버스 타고 가본 적이 있다. 걸어서 가본 적이 있다. 벗꽃이 핀 때는 거기서 죽은 적도 있다. 하나님의 시온성이 벽돌 하나 없이, 들고나는 바람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있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살며 일하고, 늙고 대충 살고, 단 하나의 위계가 있다면, 바다와 육지의 그 정도 차이 뿐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반기는 마음이 있고, 그것이 내가 되었든지, 영광이라는 불멸의 이순신 같은 이름의 강요에서인지. 영광에 취한 사람은, 무안에 가서 행패를 부릴 정도인 것이다. 우리는 교과서가 없고, 선생님이 될 수는 다양한 직업이 많아서도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순신이 위대한 것은, 전쟁이 없어도, 거북선을 건조하였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전쟁은, 전쟁 이전에 장군이었던 사람이 임하면, 승리할 수 밖에 없는 해수면 상승과도 같은 것이다. 오토바이 사기통을 타고, 젊음의 나름 배타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그 시간을 점령하였다는 것은, 그곳이 불교의 최초도래지가 되는 살아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잊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바다 속에서 살아서, 좀더 깊은 바다로 헤엄치기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먼발치에서 자극이 되는 것이다. 술은 이상하게도, 거룩함을 타격하는 것이 있다. 술이 깰 때, 달콤한 사탕을 입에 문 듯한 사람은 없다. 사람이 거룩함이 일절 없이 살아도 되는 것처럼 술에 취하다가, 그것이 깰 때는 그것의 기초 신진대사가 다시금 찔러지는 것처럼 우리는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 신학대학 다닐 때, 사람들은 술에 곧자왈 취했다. 그리고 아침에 내 친구 버거스처럼 되어서 일어났다. 나는 그때마다, 어째서 여자들은 술에 많이 취하거나, 오래도록 마시지 못하는가 아쉬워했었다. 그것은 남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들은 어째서, 음악과, 사상과, 문학과, 자기 삶을 가지고 오래도록 술에 취하지 못하는가 했었다. 선험적종합판단이라는 말도 있고, 선험적통각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의 의식은 문어의 불필요한 다리처럼 열 개가 되었다가, 오징어의 뼈처럼 아침에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은 틀어주지 않는다. 얼마나 드라마는, 일단의 능력이 없고, 절제함이 없고, 일본이 조금 그렇지만, 반드시 자격을 갖춘 드라마를 사람들에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내게 클래식 음악을 틀어준다. 그리고 뒤늦게 읽은 것이지만, 쉘링의 종교철학과 합성이 된다. 그때는 그것을 번역한 교수님을 찾아가볼까도 싶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 나는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소설이 꼽혀 있는 친구의 책상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었다. 그것이 어디로 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한신대를 다닐 수 있다는 느낌은 갖고 있었다. 오전 내내 피곤하고, 냄새는 나지 않으나, 오징어의 뼈 이상으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 형숙이는 나와 헤어져 있다. 그 무렵, 다시금 정확한 시간을 알아볼 수는 없으나, 나는 오직 뒤나미스의 면으로만 학교를 통과할 수 있었지, 학과에 소속하고, 친분을 쌓고, 섬세한 나무 가지 쌓기와 같은 미래를 두고 교수님과 상담한 이력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건물 내 비닐하우스의 통로 같은 것이 없었다. 나는 암반수와 같았고, 탱크와 같았다. 나의 리버럴 에듀케이션은, 오늘로부터 시작해서, 쓰러지지 않는 것으로 있었다. 그것에 대한 확신은 대체 어떠한 심리적이며, 정신적이고, 문명적인 호전성, 그러니까 아프리오리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리오소. 그 말이 그 말일 것이다. 바하의 아리오소. 허윤정. 나는 뽀뽀 동산에 올라서,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의 합격 여부를 알아보았다. 조선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만큼 주자의 권력적 원죄로부터 자유롭다는 다비드 형상이 아닌가 한다. 나는 학자에게도 철제의 상자가 필요하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좀더 예쁜, 기생을 바라보는 색감은 아니더라도, 여학생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차에 올라 탈 만큼의 돈을 번 사람이, 백제의 기차역에서, 늦는 바람에 올라타지 못하고, 한 몇 십미터를 전력질주하는 것처럼, 나는 반년 반년 부적절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는 것이 아닌가? 학교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시험을 잘보는 것에 일단 있다. 사람이 한달에 한번 에세이를 훌륭한 문장으로다가 잘 쓰면, 그 사람은 시험도 보지 않고 진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시험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전 학생을 그렇게 봐줄만한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도 그럴 만한 학생도 없는 것이다. 시험은 학생의 측면에서도 씸풀한 것이다. 그냥 조선 후기 실학 사상 배우는 것이고, 그것으로만 미안하니까, 대표적인 인물과 저서명 같은 것을 외우는 것이다. 

 

 

 

나는 내가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대신에 나보다도 뛰어난 학생이 진학한 것으로는 어째서인지 조금도 여겨지지가 않았었다. 맨 처음에는 그랬는지 모르겠다. 맨 처음에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한 소견인지는 모르겠으나, 한신대 다닐 때의 친구들은 하루하루 에세이를 훌륭하게 작성하여서, 한신대에 끊임없이 재입학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 같았고, 서울대의 학생들은 늘 언제나 아는 것이 두렵고, 빠져나갈 구멍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가끔, 누군가로부터 시킴을 받아서, 있는 미덕을 내 앞에서 훌륭히 보여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사랑스럽고, 예쁘기는 했지만, 사회생활하는 사람들은 서울대의 사람들이 그런 면이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도 취직하지 않는, 취직할 수 없는, 인문성 같은 것이다. 일종의 백낙청 같은 것이다. 고려대로 불하한 김우창 같은 것이다. 왔다 장보리 같은 생활세계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리기도 어렵고, 하루하루 스토리도 어려운 스머프 마을 같은 것은 아니다. 공부는 잘하는데, 걸으면서 등에 맬 수도 없고, 한 손에 들 수도 없는, 옛날 데스크탑 컴퓨터 같은 것이 있다. 이공계 학생들은 그것들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인문대생들은, 새로운 야만에 봉착해서, 심령 사진으로 보자면 어쩔 줄을 모르는 것으로 우루루 몰려가고, 우루루 몰려들어오고 하였다. 나는 학생회관에서 엘에이 컨피덴셜을 보았다. 공짜로 보고는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보자. 한신대는 그 자리에 공작의 화려한 깃털 같은 채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미친 것처럼, 포미닛, 미친 것처럼, 일주일에 한편씩, 서울대생이나 서울대를 찾아오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무중력적인 축제 같은 것을 연다면 모를 것이다. 영화의 여주인공은 예쁘고, 내 몸의 무기가 그것을 능가하는 존재를 찾지 못할 때 갖게 되는 심리적 불안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나중에 서초 국립 도서관에서 신간 디자인 책을 탐독하고 내려오는데, 죽고자 했었다.

 

 

 

 

비행기 타고, 외국 가는 무용담 밖에, 사람들이 내게 올릴 장계가 없었던 것이다.........

 

 

 

오연서가 탄젠트의 비극을 연출하면서 가장 예쁜 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동시에 무의식적인 것이다.......

 

 

 

 

나라 전체가 아주 무의식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