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보물들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우리나라는 희한하다. 그것을 말로다 할 수 없다. 우리가 영문학을 이겨내고, 고대 그리스 철학을 아는 것은, 우리 자신의 태종대가 늘 오륙도 살벌하기 때문이다. 문학도 없고, 그리스 아고라도 없다면, 멀쩡한 사지로 돌아다닐 거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예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면 모르겠으나, 공부를 대학원까지 내면적으로 잘 했으면서도, 멀쩡하고, 돌아다닐 거리가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이 영문학과 고대 그리스 철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위아래 위위아래, 서울광주, 서울서울광주하면서 지낼 수 있는데, 처음으로 대림혼다 전라북도와 다른 남도와 충청도, 서해안과 남해안과 섬진강과 부산과 경주와 호미곶과 영월 등을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엉터리 계측이 있어서, 오직 지리적인 마일리지로만 정신을 측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위아래 위위아래로만 다녔던 때는, 군대는 군부독재라고 해서 제외하고, 지금보다 못했다고 할 것이다. 장미인애는 그때도 좋아했던 모델이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콘추롤씨 콘추롤브이가 된 것 같다. 내가 단 일 킬로라도, 단 십 킬로라도 진행하여 들리는 목소리는, 아버지 신학 공부하고 싶어요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목사거나, 다른 데에 재능이 없으면, 집에 있는 닭장에 가서 알을 가져오는 아침 시간처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이 들린 것처럼, 간질에 걸린 것처럼, 고작해야 성경 공부 조금 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으로 불타오르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경주의 보물은 그래서 생성된 것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것으로는, 대단히 고통스럽고, 다만 대외적이 것이라 할 수 있다. 국내용이 아니라, 국제용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무등산을 내려오면서, 삶이 급전직하하는 것을 느낀다. 광주는 호구지책으로 질주한다. 내가 부산의 플라타너스 저녁 풍경을 질주했을 때, 어쩌면 가까운 광주의 호구지책을 슬퍼하였는지 모른다. 서울의 허무를 노래한 것은 아니다. 서울은 보답이 충분하다. 그러나 광주는, 인내천, 내가 아니면, 님을 위한 행진곡 같은 오일팔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없이, 남의 오일팔 밖에 없는 독특한 high guest(고객)를 그대는 느껴본 적이 있는가? 장미인애를 보면, 라이노 캐드에는 숨기기 기능이란 게 있는데, 그것을 숨기기 기능으로 하고 찾아온 주얼리 매장의 고객처럼 보인다. 내가 없다면,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소년 소녀가 없다면, 우리는 실론티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경주와 부산이 광주를 상대로 태어나게 된, 탄생하게 된 계기가, 다만 주어의 술어적 기능에서 파생되는 위대한 문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누군가의 시에서처럼, 장미는 카나리아의 붉은 피가 떨어져서 만들어진 것 밖에 생각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세상에, 화순의 운주사가 있고, 가까운 곳에 보물의 성이라는 보성이 있는데, 경주는 딱히 운주사의 파생 같고, 보성의 드러난 형태 같이만 보이기 때문이다. 대체 왕들의 역사를 곧이곧대로 믿는가? 아직까지 그것을 가르치고, 그대로 배우는 사람들이 있는가? 법흥왕이라고 있는가? 아마도 일본 야쿠자나, 홍콩 삼합회 회원 중에 그런 이름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무런 문법이 없는 사람이, 다만 그 정도의 허리 높이의 이름을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금가루를 강당 가득히 쏟아붓는 것과 같은 일인 것이다. 나중에, 우리는 후대의 이름 붙이기에서 그것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니 얼마나 오랜 실험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이름은 칸딘스키이고, 한 사람의 이름은 클레이며, 한 사람의 이름은 마네이고, 한 사람의 이름은 모네이다. 어려서부터, 고흐, 오직 자기 이름의 높이에 용맹정신해서, 고작해야 환쟁이나 되는 것이다. 그나마 이름이 얕고, 할 수 있는 것이 붓질인데, 법흥왕이라고 해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북두신권의 켄신과 라오우를 계속해서 보고, 때로는 기생수도 보고, 아방가르드하게 그것을 연출도 하고, 도저히 웃기지도 않는 일이 우리에게는 늘 펼쳐지는 것이다. 왜. 그것의 붉은 산. 못되겠는가? 김동인은 삵이라고 해서, 못된다고 했다. 산이 아니라 삵이라고 말하면, 산의 기운이 삵에게, 작은 규모지만 용맹정진해지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작가의 이름도, 다모의 오에스티 매화밭에서처럼 아름답기 그지 없는 김동인이다. 김동인은 나름대로, 긴카쿠지, 성공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처럼 싱그럽고, 신현균, 아름답고, 장미의 빛깔과 향기처럼 드러나지 못했다. 작가는 주인공처럼 죽는다. 그래서 주인공이 자주 죽으면 안되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유가 된다. 주인공이 많이 죽으면, 작가는 끝에 허무해진다. 빌둥스로만이 엘리트 국문학도에게는 늘 문제가 되는 이유가 그것이고, 서양의 것이 늘 별 것도 아닌 것으로다가 시작하고 끝이 나는 이유 또한 그것이다. 아인츠바이 아인츠바이. 독일 소년들은 유겐트,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리고 제국주의를 실험하던 일본도 비슷하였다. 그러나 빌둥스로만. 그런 빌둥스 다음에, 아무런 로만이 없는 것이다. 어린이 앞에서는 무한한 게 바로 그와 같은 빌둥스이다. 우리는 대전 이전에 있었고, 대전 이후에 있었다. 충청남도 대전을 말하는 것처럼. 대전 옆에 세종시가 있는 것처럼. 대전이라는 구조주의가 있다면, 세종시는 그것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어째새 빌둥스로만 로만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일까? 빌둥스를 백 개 채우면, 드래곤볼에서처럼, 로만을 하나님이 하나씩 허락하면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시카고? 그것은 한 단어로 이루어진, 인디안 말 같은 반어법이다. 어째서 부산이 있고, 어째서 경주가 있는가? 어째서 사람들은 자살을 생각하면서 사는가? 일본이 가까운 것은, 자살을 했다가 헤엄쳐서 대마도에 이르고, 헤엄쳐서 일본까지 이른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내면적인 우주를 놔두고, 일본이, 조선이 싸울 일이 없는 것이다. 둘이 싸운다고 한다면, 무등산의 돌들이 일어나, 경주 가는 길의 구릉들을 혼내키는 일이 되는 것이다. 부산 사람들은 일본을 싫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마침내는 일본 사람들에게 우리가 남이가 하는 소리로 끝이 난다. 오아리가 진다. 왜냐하면, 사회성이라는 것은 아저씨들의 와이엠씨에이이기 때문이다.
불후의 명곡이 지금은 질소로 잘 굳혀진, 장미의 득특한 아름다움을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장미인애와 사귄다는 소문만 돌아도, 그것은 깨지고 말 것이다.
어떻게 구릉의 아들들이 섬진강을 건너와서 싸울 수 있었을까? 그것은 라오우 켄신과 같은 이름 등급으로서의 법흥왕과 같은 경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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