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힘(1998)과 비좁은 하나님의 도덕성의 문제에 관하여
영화 중에 여자아이가 강릉역을 배회하는데, 문 밖에서 들려오는 효과처럼 화면 바깥에서 택시 아저씨가 어딜 가느냐고 호객 행위를 한다. 귀엽고, 차분하고, 똑똑하고, 모험심도 있고, 주인공 같고, 삼대의 경애도 같은 여자아이는 크게 소리 친다. 아무데도 안가요. 그것은 꽉심이다.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고, 하나님은 섭리하신다. 그것이 꽉심이다. 어린아이가 술심부름을 잘 다녀오면, 옛날에 마을 어른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용돈도 줬다. 어린아이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자기의 흥분과 쾌락으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과 오래 살기 때문이며, 아직 술을 마시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는 착한데, 머리가 조금 미치지 못해서 공부를 못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꽉심을 자기도 몰라서, 내내, 착하게만 보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다. 꽉심은 닼사이드오브더문과 같다.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것의 표현법 같은 것. 우리는 얼마나 처절하게 싸우는지 모른다. 선생은 선생으로서의 정명론. 경찰은 경찰로서의 정명론. 아내는 아내로서의 정명론이 그것이다. 예수 인간 기쁨의 소망. 그것은 아파트가 테라하게 높으며, 좀더 좋은 목욕탕에 다녀오는 길이고, 주변은 깨끗하며, 나무는 수십그루가 빠지지 않는다. 산소는 인간 호흡의 기본. 어깨가 노출된 곳이 없고, 하의 실종 같기는 하나 홍상수의 어법과 조명 분위기 식으로 말하면 실종 신고는 하지 않는. 국문학적 말줄임. 서울대. 혹은 원광대. 우리 사는 곳의 저녁 조명이 아름다운. 여자는 모든 전감각적 영화로운 곳에서 전화기를 부여잡고, 시니피에, 누구를 위해서 춤연습을 했는지 모른다면서 운다. 감독은 살수차를 뿌리고. 문학적 허용. 색다른 각도로서의. 바로 이것이 헷갈렸다고 시험에서 틀려서 왔는데, 자기 말은 들어주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얼마나, 다윗은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개별자의 신성 같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서러워 울었던가?
나는 그때 너무 재밌게 봤었다. 그리고 홍상수가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될 것으로 점쳤다. 그런데 나머지 작품들 중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하는 것만 빼놓고, 거기서 거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도의 힘이 너무 대단해서였을까? 처음이자 충분한 단막극이었던, 그 우연적인 여자들끼리의 벤쳐. 돼지가 우물에 빠졌을 때도 모더니즘의 느낌은 있었지만, 강원도의 힘은 지리산에 안치될 수 있을 정도의 깊은 파괴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지금도 보인다.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놈이 중죄를 저지르면 베스킨 떠리원 제로 문학 동네에서는 (0) | 2012.10.06 |
---|---|
아무래도 강원도는 파내는 것이 낫겠다. (0) | 2012.10.06 |
점장이들(2012)과 누워 있는 하늘 거울로 지나가는 새하얀 창 (0) | 2012.10.03 |
문학강좌는 개별자를 무엇으로 보는가? 그것의 접시꽃 당신, 시집 같은 찰라...... (0) | 2012.10.01 |
개별자는 소설을, 그리고 오토바이를 닮았다는 가설: 바하의 신포니아??..... (0) | 2012.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