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장이들(2012)과 누워 있는 하늘 거울로 지나가는 새하얀 창
우리는 공부를 높이 여긴다. 그러나 창작을 더 높이 여긴다. 공부는 답이 있고, 취직도 하고, 재빠르지만, 창작은 느릿하고, 잘 모르겠는 친구들이 많고, 당장에 그들이 인격적인 시험을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가지는 하나가 아니었던가? 우리가 고려를 조선과 구분하는 것은, 무슨 대단한 특징이 완전 달라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상감청자의 은은한 빛이, 조선 백자와 사람이 일백번 고쳐 죽을 만큼 전혀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맥심으로, 안에서 깨진 바가지 밖에서도 깨진다는 것을 갖고 있다. 맥심은 보리 맥, 마음 심. 사천의 매운 음식이 유명한데, 훠궈라고 매운 샤브샤브 비슷한 음식을 티비에서는 한 수십 번을 본 것 같다. 그곳의 여행자 왕이 되어서, 아내와 아이들과, 혹은 바람난 처녀와 매운 훠궈 요리를 맛있게 먹으면서 흘리는 땀이 과연 분자화학식이 전혀 다른 물질이겠는가? 피곤한 마음. 가난한 육체. 지식은 대도시의 문학 교수 같고, 하는 말은 날카로운 시험이기보다는, 그것의 사랑의 짝대기 비슷한 창작으로 창작으로 무수하게 던지는 돌과 같다고 한다면, 체면은 치러지고, 위엄은 아주 어린 학생들에게는 서게 되며, 국가를 위협해서 돈이 나올 구석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시험이 참 창작 같을 때가 있다. 그것은 점수. 차가운 형식물이 될 것이다. 내용은 돼지 껍질 같고, 맛있게 먹는 사람은 콜라겐이 필요로 하는 처녀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청년들 뿐이다. 사도바울은 예수에게 다메섹 도상까지 쫓기는데, 왜냐하면 말이 너무나 인민을 겉돌고, 맥심이 없고, 그것들 사이에서 우열을 구분 짓고, 어째서 서울대에 오려는지 모르겠다는 최종최후의 데드싸인을 무의식 중에 던지는 것이다. 촉은 그렇지 않다. 촉은 전혀 다른 분자화학식이 아닌 것이다. 사도바울의 로마서와 마태복음이 천양지차이긴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라는 패키지로 알고 있고, 핵심을 쏠 줄 아는 혜안들은 그것이 하나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니 결과가 어떻게 되었건 쫓기는 중이고, 얼마나 눈물이 쏟아져 나오겠는가? 베니스의 상인에서, 위대한 셰익스피어, 숱한 학자와 비평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샤일록의 유대이즘의 여러 속성이 실은 맞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정확하게, 힘이 동등하고,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인 경우, 빚을 갚지 않는다 할 때, 그것은 고려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힘이 빚을 진 쪽에서 많고, 혹은 상대적일 지라도, 다른 데에도 돈을 쓰는 것을 전해들은 다음에라면, 빚은 내준 사람은 그 사람의 살이라도 저당 잡혔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의 흉포한 가면은 문학과 실재를 넘나든다. 그리고 순진한 마을 청년은 자기의 살덩이를 갖고 돈을 빌리게 되는데, 마침내 갚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샤일록은 한국 이름 같다. 그것은 아름다운 절과 같고, 절의 풍경이 아니라, 절경을, 그것의 무한함을 가리킨다고도 생각한다. 우리는 집에서 상처 받고, 절에서 집 같은 느낌을 얻는 것이다. 지금의 근현대인들도 그러는데, 조선시대는 오죽 했겠는가? 집도 기와집이요, 사대부 가문인 경우, 절도 기와집이니, 빚도 지고, 빚진 자의 형이상학을 가진 나실인인 경우, 절에 가면 현균이 자네 왔는가? 환청을 듣지 않겠는가? 마음의 피로. 육체의 피로. 결혼의 피로. 하나님과의 계약의 파기. "사람이 피로가 없이, 빚을 질 수 있으면, 약속한 고기를 가져가보라." 이렇게 사람이 지식인으로 주인공 삼고, 시험과 같은 문학적 강성을 유지한다고 해도, 양명학적 우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데, 무슨 찌라시 같은 말들을 헐거운 문학에다 주례사 비평들을 해대고, 사람들의 짧은 낙차의 폭포를 구경하고 자빠지는가? 어디 작은 강에 있다고 한다. 사람이 힘이 없으면 풍경 하나에도 부치는데, 맥락조차 없으면 우리의 문명은 대상의 우상에 속절 없이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영화는 싸우고자 한다. 전체적인 밸런스는 맞지 않지만, 대도시 종합대학 문학학과에 다녔던 유사 기억이 있다고 한다면, 그 희미한 구멍에서, 제법 고로쇠 수액이 쏟아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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