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의 '산'이 갖는 한국어의 무등산적 대특징......
영도대교를 건너다 보면, 사람들은 모텔로써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쓸데없고, 느닷없으며, 까닭 없는, 돈오점수이다. 그런 것은, 오대수, 안다 해도 도움도 안되고, 쓸데도 없고, 아무데도 갈 데 없어, 일박이일 여자친구 편을 따라가기 정도인 것이다. 우리는 따라갈 수 있을까? 과연. 우리의 단단한 실체적 감각을 놔두고, 그림과 글과 말이 이끄는 데로, 참전하고, 사랑하고, 비행하고, 여행할 수 있을까? 그것을 다 할 수 없으니, 여행하는 것이고, 영도대교를 간 다음에는, 그것의 움직이는 실체가, 젊은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모텔이었음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성적 실체가 이처럼 강고해지고 나니, 이효석의 '산'과 같은 이성도, 이성처럼 안보이고, 모텔처럼 보이는 것이다. 모텔이라는 사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국문학자도, 음악과 학생도, 이런저런 회사의 사장도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연히, 그리고 빠르게, 중국 사자상처럼, 그것의 사상처럼, 사상구 초유의 일처럼, 뭉쳐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인 것이다. 채만식의 맹순사를 보면, 그것의 뭉쳐짐이 자기로부터도 되고, 남으로부터도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개인의 절개로 인해서, 비오는 날, 광역 버스에 올라타자, 안운데자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다만, 채만식 정도의 흐름에서도, 그것의 에메랄드 보석은 반짝이는 것이다. 그도 젊었을 때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은 그것을 위한 개구리의 움츠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움츠렸다, 언젠가 한번 도약하고자 한다는. 그의 죽음의 시기가 사십오년 보다 고작 오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초절정의 무음 기교처럼 해석이 된다. 채만식조차, 존재의 탕왕으로 불릴 수 있었는데, 이효석의 산은 거두절미하고, 분명 그와 같은 분위기를 농후하게 내비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와 같이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일까? 산의 풍경이 나오고, 노비였다가 나오게 된 에피소드가 나오고, 혼자 지내는 재미가 나오고, 옹녀 생각이 나오고, 마을에 다녀온 다음에 단잠이 드는 이야기가 전부이다. 알퐁스 도데의 우리 국정교과서의 소설이 생각나기도 한다. 윤동주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러니 그의 소품, 정말 소품, 그것은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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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 그네를 타면서, 예쁜 여배우가, 신발을 던지는 것을 받는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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