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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일드: 짬봉 먹고 싶다. 1편을 보고.......

by 마음대로다 2015. 6. 11.

일드: 짬봉 먹고 싶다. 1편을 보고.......

 

 

 

 

 

 

 

우리들이 일본 드라마를 보면서 드는 것은 늘 언제나 충격이다. 하나는 이질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 시원스러운 도시의 풍경이 늘 언제나 전면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리깐, 인간의 기초상식으로서, 주인이나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건물은 없는 것이니까. 여자들은 약간 자포니즘적으로다가, 건어물녀. 나는 건어물녀 여대생을 좋아한다. 그와 같은 호칭은, 매우 파워가 있고, 그것은 아닐 것이라는, 그렇게 자기를 여기지는 못할 것이라는, 믿음 소망 사랑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들과의 파격적인 프렌치 키스, 딥키스가 가면라이더 시리즈가 아닌가 한다. 그것을 두고 성공을 거두었다. 불멸의 이순신을 달성하였다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다만 그것들의 주제가 모음집 만큼은, 하늘을 뚫고, 도리어 우주의 적막과 어둠을 만나게끔 한달까? 우리는 지구를 살지만, 지구의 자기 의식으로서의 우주감 같은 것이, 간리깐,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간은 프렌치 커넥션을 노리는 영화들을 많이 배출했었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펄 하버를 최초 공격했던 일본 공군보다 파격적이다. 펄 하버 공격은 비난만 살 것이나, 프렌치 커넥션은 칭찬만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다. 우리 중에는, 우리들의 칭찬과 도덕 중에는, 결국에는 펄 하버로써 오아리가 지고 아다리가 지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눈 앞에 좋고 아름답고 단정하고 검소하며, 앵글로 섹슨족, 소박하고 안분지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아무런 해도, 잘못도 없으나, 반드시 지구로써 모여서, 펄 하버 공격이나 감행하는 관치금융이나 스피드, 그런 것이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 일본은 한국에게서도 도덕적인 기를 펴지 못하게 되었고, 미국을 향해서도, 도덕을 상납하게 되었다. 한반도가 반만년 동안이나, 남의 나라 침공을 하지 않는 것은, 그놈의 이야기성 위에서의 도덕성의 헤게모니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메르스를 일으켰다고 해도?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 때문에, 양적으로 그것이 보호되고 차단될 수 있다. 일본에서 나와 같은 사람이 나오기가 어려운 것은, 한국도 침공하고, 중국도, 필리핀도, 미국도 침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저변은 지옥 같고, 슬픔은 도리어 한강이 되어 일본으로 흐르고, 그것의 남해로 흐르는 섬진강이 아닌가 싶다. 모든 사람은 사필귀정, 그러하다. 저마다의 평형수, 그러하다. 하나님은 견딜 만한 사람에게 시련을 주신다. 그러하다. 그러나 일본 드라마를, 가끔 좋은 것을 보다 보면, 앙드레 가뇽 L'Air du Soir 눈물이 쿠쿠전자 밥통처럼 터져나온다. 그 한 시대. 나로부터는 한 세월. 일본은 늘 언제나 국수주의적인, 광기와 섹스, 감각의 제국적인, 사이클은 가장 먼저 그려내었으나, 빠져나올 수 없음 또한 보게 되었다. 오직 일본의 영화나, 드라마, 음악마저도 침강되었는데, 기적처럼 솟아오르고, 우리에게 나스타샤 킨스키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언젠가, 일본을 가장 민낯으로, 민나, 그것은 우리말로 너희들, 가장 좋은 낯으로 보아줄 사람이 한반도에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이 일본 땅에는 있지 않았나 싶다. 얼마나 많이, 왜구는 한반도를 침공했었나? 얼마나 우리는 그것들을 배우는가? 그런데, 그런 것을 다 견디고, 참고 장미인내하면서, 피를 알프레드 프르푸록 토해내면서, 꽃향기와 아름다운 몽유도원도를 그리고 펼쳐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나타날 수 있겠는가? 무슨 말이냐면, 일본의 입체는 세계 미학 사상, 유일무이할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것에 붙어있는 것은 전범국가라는 딱지 하나 뿐이다. 마치 차압당할 것처럼. 그리고 전범국가를 옹호하는 말을 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만한 좋은 토지가 일본에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일본의 양심.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이 없다. 양을 찾는 모험. 양사나이. 그러나 일본의 흑심, 야마하 엠티공구, 그렇다고 하면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샀다. 산 것들은 물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법. 가타바타 요스나리, 할 말은 없다. 다만, 우리들의 실질 외교는 그 정도 수준에서 멈추게 되는 것이다. 짬봉, 짬봉이 먹고 싶다는 드라마가, 답보 상태에 있는 한일 드라마 축구장에 등장한 것이다. 뭐 잘하는 플레이어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공이 늘 그에게 가고, 그가 또한 다루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일본 드라마나 애니를 보았을 때, 처음 본 것 다음으로 좋은 작품들이 진쳐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겨우 열두 척 정도. 열두 척 정도를 보고 나면, 더 이상의 것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무게와 실질 삶과도 유비가 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도 열두 척 정도의 아름다운 시절을, 기간을 보내고, 나머지를 다만 체질량 개선에 골몰하면서 살지 않는가?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도, 산맥을 뛰어다녔다면, 군대에서 내게 강요한 것, 일본 드라마와 영화도 같은 내용으로 가득찼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지 못하는데, 일본 드라마와 영화가 그럴 이유가 없지 않는가? 볼이 늘 그에게 가고, 그는 짬봉 먹고 싶다 하면서, 공을 잘 받고, 잘 넣어주고 하고 있다. 일본은 그처럼, 니혼진이 있고, 태양인이 있는 것이다. 태양인이 자기들에게 나오지 못하면, 한국에서 나올 것이다는 동양 사상이 있다. 사상과 철학, 문예학은 대체 어디서부터 역사의 기록들을 망각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을 잘 알려줄 수 있는 학자와 사람이 우리들 중에는 있을까? 내가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네가 그렇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베드로 앞에 나타난 짬봉처럼, 도리어 그것이 먹고 싶은 단계에 우리가 이른 것이다. 그것을 통과한 다음에야, 고전적인 질서와 균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