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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카바라조 인문학 강의와 수애의 '가면'을 스치듯 보았다.

by 마음대로다 2015. 6. 7.

카바라조 인문학 강의와 수애의 '가면'을 스치듯 보았다.

 

 

 

 

 

 

 

 

사람들이 무진주에서, 신씨아, 살다가 지방으로 다시 내려가서 살지를 못했다. 우리는 생각한다. 진리의 수위를 높이고 사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가식일지라도 공공의 도덕을 높이면서 사는 것이 나은가? 예술만이 대답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용, 마치 중국 중 자와 한반도 중 자의 영원불멸의 겹치는 기능 없음처럼, 겹쳐지지가 않는다. 대게의 경우, 진리의 수위는 낮아지고, 산업과 경제, 통치와 체적의 도덕을 내세우게 된다. 노자의 도덕경이 그래서 도덕경이 되는 것이다. 지독한 표현으로는, 소녀경에 육박한 인문학적 분위기로 점철되어 있다.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벌판에서 고구마 먹고, 눈 내리고, 내린 눈 다 맞고, 엎드려 거북선처럼, 이순신 장군의 군영에 들어가 전쟁으로 내세를 기약하는 자기 모습을 보지 않는 사람은 읽은 것이 아니다. 그처럼, 산뜻하고, 개나리 봇짐 같은 것이 없다. 두보도 이백도 등고산악양루 많은 루상에 오르는 시편을 썼지만, 도덕경의 오르는 이야기처럼 절절한 것이 있을까 싶다. 한층 오르면, 한학기를 지낸 것 같다. 여자는 한층 더 예뻐진다. 결혼은 한층 예뻐지는 것을 상정해서 하는 것이다. 수애를 보면, 한총 쏘고,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매우 좋은 템포처럼, 결혼이라는 카바라조에 빠지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카바라조. 그는 어쩌면, 앙드레 가뇽 샬레보, 명나라 조승훈 장군이었을 것이다. 이태리 이름이 카바라. 그래서 동양에서건, 서양에서건, 이태리는 서양이 아니지만, 카바라조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린다김, 지아이조, 마이클엔젤로 익숙한 이름 부르기가 없다. 결혼은 카바라조와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내가 자주 거론하는 쇠라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 쇠라해지는 것은 아니다. 점묘법. 혹은 현철 자끄 데리다의 위대한 명제 디컨스트럭션의 산뜻한 데지그네이션. 하지만 남극과 북극은 통한다고, 카라바조와 쇠라는 같은 것임을 우리는 과연 부정할 수 있을까? 부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외면할 수 있을까? 아닌게 아니라, 매너리즘이라고, 디자인과 정식 화가의 중간 단계의 그림들이 당시 이태리에는 만연했다고 한다. 우리는 차라리 쇠라해지고 싶지 않는가? 다만 방법을 모를 뿐. 가히 엄청난 빛을 가져와서, 도리어 카라바조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명품 구두 명품 백을 선호한다는 말을 두고 단 한번도 그것을, 쇠라의 정신분석학적으로 비판하거나, 동조하면서도, 그러니까 말자는 것도 아니고, 혐한 분위기를 구축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다가, 적당히 매도하는 서적을 만나지 못했다. 디자인이 좋다는 둥. 카바라조. 이니셜디. 오제이씸슨. 그 명품 가방이라는 것은, 아버지 가방이 분명한 것이다. 일렉트라 콤플렉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도 분명, 최서해의 탈출기처럼, 엑소더스를 꿈꾼다. 탈출만이 능사가 아니고, 홍염만이 능사가 아니다. 중국인 지주의 집에 가서, 개성공장을 꾸릴 수도 있는 것이다. 최서해는 알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다른 일제 시대 작가들도 그와 같은 두부 현상, 모퉁이 현상 같은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두부를 알지 못하면, 두부에 빠지나, 두부를 의식하면, 잘 잘라서, 효용에 정확히 넣으면, 사람들을 인문학의 빛나는 영웅으로 만든다는. 어쩌면 두부와 인문학의 상관관계 속에서, 내가 처음으로 하는 말인 것처럼 느껴지는.

 

 

수애의 가면은 계속해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에, 한 이십 분조차 못봤던 것으로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수애는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읽은 것이 저장이 되지 않는다. 주자학은 남자학으로서, 대게의 여자는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양명학으로 빠지고 만다. 마치 낭떠러지 카바라조에서, 남자는 튀어나온 나무 뿌리를 잡는 것 같으나, 여자는 잡을 수 없는 것 같은, 말이면 다 되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게의 문학은 장군학이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 박씨전을 읽고 좋아했던 것도, 그만한 것을 앞으로의 인생 중에 단 한 번도 읽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장군과의 동일시는 바울 서신에서조차 천편일률적이다. 여자들은 꽃잎을 달고, 입기까지 한다. 아무리 검정색 깊은 카바라조를 읽었어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빠지고 마는 것이다. 동일시이거나, 마이너스이다. 그것을 군대 용어로, 빠져가지고, 그러는 것이다. 사랑에 빠져가지고. 능률도, 지식도, 생산성도, 그때문에 빠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드라마 자체가, 두부이다. 우리는 맛있게 먹는다. 동해에 놀러가서, 아직 여름 성수기가 닥치기 전에, 수애나 장미인애와 함께, 얼굴을 스카프로 가리고, 나는 내밀고, 적당한 민박집을 가는 것이다. 소나무가 모래 위로 듬성듬성 나 있고, 오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집은 아주 깨끗하고, 아직 손님들이 수박을 깨먹은 냄새도 풍기지 않고 있다. 강원도로 가면서 대충 점심을 사먹었고, 저녁을 이제는 지어먹을 차례인데, 최후의 만찬, 그것은 나남출판사처럼, 지속적인 남의 시계이자, 정확한 고전이 분명한 것이다. 어째서 인간은 많은 공부를 해야하고, 그 수많은 단어들은 대자가 되지 못하고, 즉자처럼, 수애의 목소리로만 남게 되는 것일까?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장미인애는 기억하려고 애를 쓰지만, 자기 논리가 없는 기억이 무슨 나의 기억이 되겠는가? 도리어 수애는 귀여운 너구리처럼, 단정하고, 장미인애는 또다른 귀여운 봉산탈춤처럼, 약간 미친 듯이 보이는 것이다. 군대에서 행군중에 보았던 두타연처럼, 둘 다와 갔다면, 행복에 빠져서, 문명은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데자뷰처럼, 무한도전 인도편의 강균성의 묘사처럼, 두 여자와 같은 짓을 하는 것이다. 수애는 오후 네 시경에, 장미인애는 여섯시 경에, 두부 된장국을 끓여먹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아. 드라마는 두부와 같다는 명제........

 

 

 

드라마는 대게, 도시의 단정하고 바쁜 사람에게는, 비수기의 바닷가와 같은 느낌으로 진쳐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카바라조처럼 수애와 장미인애와 바닷가에 가고 나면, 드라마는 수많은 사람을 실은 배처럼 떠밀려내려간다는 사실이다. 클래식에는 아름다운 뿔피리 소리들이 많이 있다. 귀여운 산양이 바닷가의 절벽에서도, 오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고 귀여운, 겨우 뿔이 난, 그것이 바로 카바라조, 산양을 수애도 안아주고, 나도 안아주고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