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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신경숙의 표절은 사실 제비가 되지 않는다. 류승완의 베를린.......

by 마음대로다 2015. 7. 17.

신경숙의 표절은 사실 제비가 되지 않는다. 류승완의 베를린.......

 

 

 

 

 

 

 

 

 

 

 

제헌절이다. 나는 국가적 절기마다 자극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강요가 아니라, 헤겔의 철학강요, 다만 높고 아름다운 뜻이 늘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지 않는 것 같은 발라드의 음표 같기 때문이다. 솔져오브 포춘. 제헌절은 사실 재헌절이다. 이 사실을, 이 의미를 지금 처음 듣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길이를 제다. 길이를 재다. 어느 것이 맞는 것 같은가? 아야. 누군가 장난으로 팩을 찬 것을 이마에 맞는 것. 어느 것이 맞는 것 같은가? 여자들은 맞는 것을 좋아한다. 너 죽어? 하는 것은 고어이다. 그것의 화용적 조건이 뭐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들은, 한 평 되는 곳에 선악과가 있고, 뱀도 있고, 남녀가 서로 옷을 벗고 있고, 너는 내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다 하고, 하나님이 찾으니까 아담이 한 평도 안되는 곳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들키고, 도저히 갑갑해서 낙원 한 평에서 둘이 추방당하는 것이나 상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학교는 얼마나 큰가? 우리가 트럭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이 좋은가? 연세대의 안과 밖, 강의실에서 공부도 하고, 도서관에서 사랑도 하고, 밖에 나와서 또 커피 마시는 삶이 좋은가? 우리의 지방은, 우리의 기쁨은 대게, 신대방역 같은 것이다. 신도시가 아니라, 신촌이 좋은 것이다. 강촌의 원래 이름은 아무래도 신씨 성의 신촌이었을 것이다. 출판사 사장이 신촌? 그러면 너무 이름이 겹치는데 하다가, 강촌 어때? 어차피 학생들이 강촌으로 엠티를 많이 가니까. 그가 히트를 쳤던 것은, 내용도 좋았지만, 출판사 사장의 공도 컸다. 광주나 부산 지역의 대학생들은 강촌 만화를 완전 화용적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당구 오백과 날제비. 그런 식의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나 서울 지역의 학생들은 반드시 광주에 준하는 존재를 익혀야 하기 때문에, 안면도를 가거나, 화성에 오르거나, 강촌까지 가야 했던 것이다. 서울 지역의 정신은, 순수 의지로써, 예를 들면 혼자 갔다면 더더욱 측정이 쉬운데, 경포대까지 가는 것을 최고로 여겼다. 내가 언제 말했지 않은가? 연대나 고대, 건대나 단대, 상명여대나 숭실대, 그것들은 모두 경제로 포장된 대학이라고 말이다. 중앙대. 경포대까지 가야, 축포를 쏘고, 드디어 그것의 포장지를 벗겨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폭주기관차는 나와 천사의 한판 승부가 그려진, 미국영화?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보고 봐도, 그것을 나로밖에 보지 않았다. 나는 폭주기관차처럼, 광주에서 보았던 수많은 두 편짜리 영화관의 영화를 보았다. 그것의 은어는 안보인다는 것이었다. 가끔은 음모 노출을, 이태리 유학이나 프랑스 유학을 가서 만나곤 하였다. 사람의 정신이 음모까지 가서도 폭주기관차의 높은 경포대? 너무 포토샵 만용이긴 하지만, 달성하기란 어렵다. 때로는 나도, 머리 잘린 말처럼, 김유신, 좋아하는 사람에게 찾아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폭주기관차처럼, 그것의 순수한 철제의 의지를 사랑하였다. 대체 그것의 에머네이션이 누구였겠는가? 인간도 아니고, 인격도 아니고, 그것으로 발생한 정신도 아닌데, 대체 유출이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나는 그것을 보고, 나의 철제 갑옷을 만난 것처럼 흡족하였다. 그리고 아무도 그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까지도 의아해하게 여긴다. 거기서는 선악은 불모하다. 왜냐하면, 사적유물론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선악이란 선악이 투철한 사람에게는 재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선악이 뚜렷한 사람에게는 오직, 투쟁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나의 편이 없는 것을 상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일철학으로 넘어가면, 손이 내면으로 뻗어진다. 나도 추근덕 대고, 아무렇게나 전화하고, 심지어는 아이가 있던지, 남편이 있던지, 아무 상관 없는 전복죽을 먹고 불로장생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단군. 단명하는 것이 좋다. 단명할 때, 도리어 여자들의 얼굴이 예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옥시모론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을 길게 하면, 여자들은 퍼진다. 장편소설들은 폭주기관차 같은 것이다. 수많은 단편들의 조합이다. 우연히 그것의 인격이, 처음 인물 에이가 나중에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엎드린 단편이 아니다. 멀쩡히 서 있기만 해도, 그것은 충분하고, 백제에서 이층에만 올라서도 우리는 뜻밖의 교토지역에서의 광주천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죽은 줄 알았네만? 김옥균이 상해에서 죽었다는 것은, 이순신이 저 먼나라 육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믿음과 소천과 같은 것이다. 사도신경에서처럼,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어제 누군가에게 말한 것처럼, 양자물리학을 언급할 때의 화용론적인 힘이다. 일본어로 지카라. 일본어까지 익혔을 때, 한국어 힘이, 영어 힘이, 지카라가 생기는 알 수 없는 다보탑이 있다. 너무 사설이 길어져서, 마땅히 본론이 시간을 얻지 못할까 걱정이다. 지금 세계는 류승완의 베를린이, 영어 제목 베를린 파일이 신경숙의 표절 사건처럼, 제부도, 대마도, 군함도의 매게를 통한 신현균의 영화가 아닌가? 긴가 아닌가의 대논쟁에 빠져 있다. 참 우리나라의 문화의, 알 수 없는 지평이다. 러브이스 블루. 블루. 랄라랄라라라 블루. 일단 그와 같은 오류도 뿌리치지 않기로 하자. 그러니까 예의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도 있지 않는 것이다......

 

감가상각. 류승완의 베를린의 여러 속성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원작은 서양 사람의 추리소설이라고 한다. 그것을 우리의 조건에 맞춰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배우들이 출연을 했다. 전지연의 필모그라피를 보자. 드디어 붓필. 털모가 나왔다지만. 하나는 견우야 미안해. 다른 하나는 여친소. 다른 하나는 실미도.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물리치는 것이, 베를린이 된 것이다. 어째서일까? 관념과 개념의 힘이라는 것이 그렇게, 다만 단단한 프렌치 코트를 입었다는 이유 하나로 생기는 것일까? 대체, 어째서, 의류학과. 그와 같은 정신병이 우리의 마음에 근원적으로 있는 것일까? 아무런 관련도, 뜻도 없는데, 우리의 뇌리에서 전지연의 사랑이 지워지지 않는다. 마지막에 그 아름다운 갈대숲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까지도, 거기에 자막처리가 가능한 마지막을 보았을 때, 우리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정확한 말이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아무런 말도 아니다.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생각을 더하다가, 어색하면 빼낸다고 해도, 더해지고, 더해지고, 더해진다. 계속 더해지고, 두번 흐르는 눈물을 갑자기 걸려온 전화 속에서, 그 목소리를 감출 수가 없다. 영화를 빠져나오는 붉은 손. 사람들은 열정이 있어야, 케이지 같은 모든 사방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정열은 붉은 색이라는 정신병이 우리에게는 있다. 붉은 옷이 좋은데, 사람들에게는 붉은 옷이 없으니, 피를 흘리는 것이다. 나는 전지현을 사랑한다. 그와 같은 국문과 여학생을 사랑한다. 그들은 헤겔철학을 읽을 수가 없다. 습관은 어제 먹은 밥과 같아서, 헤겔밥을 먹고 싶은데, 도저히 임석진 헤겔밥을 먹을 수가 없고, 요약을 하면 너무 빨리 알 수 없는 지역으로 떨어지고 만다. 영화는 독일에서 찍고, 벌판은 러시아였다는 사실은 그것의 구조를 보충해준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신현균의 전이였을까? 서양 사람의 소설에서부터였을까? 아니면 류승완의 구조 읽기에서였을까? 제작 중에 나의 색이 전반적으로 융단 폭격이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마지막에 이르러, 전지연이 나의 얼굴을 보고, 카메라 바깥에까지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 정말 전지현이 죽어가는 것 같았다. 여자들이 학문을 배워 할 수 있는 일이란, 때로는 고양이가 되고, 집사가 되는 양가적 구조 뿐이다. 사람이 되고 싶은데, 여자가 되고 싶은데, 사랑은 꿈도 꾸지 못한다면, 국문학과를 나온 그대로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나온 과를 잴 수가 없다. 제다는 말과 재다는 말은 같은 것이었다. 얼른 생각하면서, 발음을 조금 달리하면서, 제다, 재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럴 수가 없다. 우리는 재헌절. 우리가 나온 과를 잴 수가 없다. 거의 모든 현재는, 헌, 그러니까 이전을 제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하루하루 늙은 아이로서 다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난 댓가로, 우리들의 철학은 초등학교 바운더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전지연을 보고 우리가 놀랐던 것은, 대학교 때 그렇게도 입고 싶었던, 춥기였고, 그 춥기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트렌치 코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번 영화 보는 사람에게는 드러나지 않고, 두번 세번 네번,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천고마비를 입는 순간에, 어느새 그것에 전적으로 동감하게 되는 것으로 있다.

 

나는 세상 모든 제헌절에게 선언한다. 류승완의 베를린은 나의 아무 것도 전이된 것이 없다. 생각은 마치 세포가 전이된 것 같은 형상과 형태의 제한성이 있다. 그것을 제헌절 알지 못하면, 정말이지 안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항변도 일리가 있다. 지금 세상에는, 류승완의 베를린 이상의 영화가 없다고 말이다. 거기다가, 무슨무슨 라이브까지 합치면, 합쳐질 것은 더더욱 많은데, 완전 한국 영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일본 영화가 매력적인 것은, 서로 합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일 것이다. 그렇게 한국 영화와 조인트에 들어가면, 그것은

 

 

 

 

모르겠다. 그것을 중국어로,

뫼요.

 

 

 

 

무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