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어리다는 것. 나이가 들었다는 것. 나이가 많다는 것.....
태풍 찬홈이 중국을 강타하고, 인명 피해도 낳고, 오래된 가로수들도 쓰러뜨렸다고 한다. 사람들이 기적의 치료법, 마땅한 영웅이, 소영웅이, 중화영웅이, 문예사조가, 바지사장이, 사람들을 격려하고, 바른 길로 가게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꼼짝 없이 태풍 찬홈에 당하게 되어 있다. 풍신이라는 것은 그래서, 늘 언제나, 가슴 아픈 워터프론트인 것이다. 풍신과 찬홈의 대결에서, 메가고질라와 그레이트 마징가 중에서, 누가 승리의 여신을 거머쥘 것인가? 우리는 엔트미쏠로기어룽? 탈신화화의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좋아하는 여선생님을 좋아했다가 싫어했다가, 일종의 게릴라 전법처럼, 게릴라 콘서트, 마오쩌뚱이 중국을 게릴라 전법으로 한바퀴를 돌았던 것처럼. 어떻게 보면, 태풍의 진로를 그대로 옮긴 듯한 느낌도 든다. 풍신에 당할 인간이 아니다. 바람신에 굴복할 인간의 운명이 아니다. 다만, 그것의 임계점. 마땅한 소영웅들이, 중화영웅들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매력적인 이름 점을 얼굴에 찍고, 중국 남반부를 강타하는 것에, 뜻없이 나가서 사진 찍고, 기사 작성하는 기자들의 관심이 소진될까 걱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가? 때로는 내가 다쳐도,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관심을 가지면,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나 사소한 상처를 입었어도,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조롱박만 하면, 그 사람은 남자는 고추가 있다고, 고추가, 마립간, 여자는 고추가 없다고 자살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전쟁은 다니엘의 불구덩이와 같다. 전쟁이 일어나고, 다음 날 전장에서 죽을 것 같더니만,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몇 명 죽은 동료들과 함께 돌아온 다음에는, 자기가 어떻게 살게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하나님을 조용히 찬양하지 않겠는가? 그러하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그런 경험이 없어도, 얄짤없이 그와 같은 고래가 엿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매우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태풍의 이름은 사소하지만, 사소리, 하나 흥행한 것 없이, 여주인공의 인생 역정이라는 불멸의 소재, 그것을 사진을 찍으면, 집이 날아가고, 사람들이 다치고 하는 것이다. 누군가 태풍을 볼링 공을 밀듯이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탈신화화도 아니고, 안탈신화화도 아니다. 묘하게 유아틱하고, 프릿조프 카프라 초절정의 과학의 기술에서는 가능할 것 같지만, 그와 같은 지위? 히포스타시스에 이르기 위해서는 평범한 인간의 삶으로는 가능하지가 않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볼링장의 올림푸스에 오르는 레드카펫이 있다고 치자. 그것이 우리들의 상상과, 우리들의 현실, 합쳐서 상상과 현실에서는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 느낌을 모두 거두고, 다만 레드카펫은 오늘 날에 이르러서는 영화배우들이 영화제 기간 동안에 잠깐 향유하는 문화적인 아이템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있음의 힘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 찬홈, 차갑고 시원한 올림푸스 신전, 도리아식, 하차투리안식, 그것에 오르는 죽음 같은 시공간의 현전을 반면교사로써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이 조금 복잡하게 꼬였지만, 반.면.교.사. 완전히 있는 것만 따지지 말고, 반만 획득하고, 다른 반을 덧붙이고, 우리들에게 태풍이 무엇인지? 그리고 목택동이 그 어려운 길을 걸었던 신화사통신을 적당히 블렌딩하면, 우리도 내일 죽을 것 같은 불구덩이에서, 사람들과 살아돌아와 여름 날의 찬홈을 향유하는 비정상적인 자기 기분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본질이다. 본질이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한다. 하지만 대학다닐 때, 철학을 배울 때, 어느 선생님도 본질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알아도,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 뻥일 것이다. 뻥이요. 과자일 것이다. 그들은 본질이 무엇인지 몰랐고, 존재라는 것도 더더욱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가상에 관한, 물자체에 관한. 수업을 들을 때에는 더더욱 공중의 백석 건물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반도체 강국이 되었다. 이것저것 다 합쳐서, 오직 기술적으로만 보자면, 한국에서 세계적인 칸트 전문가, 헤겔 전문가가 나온 것과 같은 현실적 높이이다. 그런데 찬홈, 옛날에는 하이엔이 사람을 괴롭히더니, 이번에는 찬홈이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는 마땅한 플라톤 전문가, 칸트 전문가, 헤겔 전문가가 없이도, 그것들을 뚫고 본질의 거탑을 캠퍼스에 달성하지 못한채, 어울렁더울렁, 김용옥의 어울림 사상으로다가, 지금 현실의 축복을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바하의 라르고.
어떻게 해야 헤겔 전문가가 되겠는가?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레드카펫 밖에 없다. 그리고 카프라, 악덕 초과학적인 주장 밖에 없다.
어쩌면 모든 학자들이 본질적인 교수, 프로페서가 되고자 노력했다가, 저마다 어딘가 고장이 나서 쉬고 있는 대지를 우리는 지금 무등산, 화순 바라보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들의 노고를 다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한신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다가, 영문학을 공부하려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지망했었다. 본질은 어느 정도는 현실이고 제도이지 않는가? 그렇지 않은가? 찬홈? 그것도 시카고처럼, 복잡 반어법적 의문형인 것 같다. 홈이 차다는 것은 자기 기분일 수 있으니, 공중의 동의를 구하는 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찬홈? 홈플러스. 홈플러스. 쇼핑을 하다보면, 그 귀여운 노래들이 얼마나 구슬프게도 들리는지. 그리고 대학원이 이년 과정이기 때문에, 이년 동안 공부하다가, 서강대에서는 비싼 등록금 한 번 내고는, 그만두었다. 본질이란 무엇일까? 어떠한 철학자도, 실학자도, 유길준도, 서광범도 모르는 것이다. 너무 이상한 말을 많이 하면, 본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너무 말을 하지 않아도, 주말에 잘 지냈느냐는 인사도 하지 않으면, 사랑의 인사, 본질에 들어갈 수 없다. 참. 본질은 있는 것 같다. 열하일기에서도 그런 말이 많이 나온다. 중국 사람들은 기껏해야 박지원에게 한반도에 악경이 있지 않느냐고 자주 물었다고 한다. 문체가 딱딱하고, 적당히 반박하고, 어느 정도는 혼내키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찬홈의 상해 풍경으로만 보자면, 그 말들이 모두 옳아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기껏해야 박지원은 매우 신비한 말을 하기도 한다. 문장은 매우 산문적이고, 비판적인데, 이런 말은 갑작스러운 것으로 분류할만 하다. 음악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 곧 음악일 것인데, 따라서 악경의 존재 유무를 따질 것이 아니라, 주역 전체를 음악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가 무슨 요한 세바스찬 바하인 것처럼 답하는 것이, 이도공간의 사람들을 적당히 눈물 짓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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