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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우리에게 지금 학원 영화가 없는 것을 어떻게 짧게 덮는 것으로다가

by 마음대로다 2015. 10. 7.

우리에게 지금 학원 영화가 없는 것을 어떻게 짧게 덮는 것으로다가

 

 

 

 

 

 

 

 

 

 

 

 

 

우리들에게 지금 결핍이 닥친 것은, 백미터 결승점의 외로운 현상일 수가 물론 있다. 그러나 옛날을 놓고 보면, 아무리 군사정권 시대로기로서니, 지금처럼 학원 드라마나 영화가 없는 것이 이해가 되겠나 싶다. 간혹 등장한다. 그리고 제법 인기를 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수준이 향상되어서, 학원의 장르가 불분명해진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고용노동부는 고용노동부 영화가, 미래창조과학부는 미래창조과학부의 영화를 갖고 있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들은 회전하는 명왕성 같았고, 사람이 없는 화성인들 같았다. 그것은 슬픈 클래식 선율이다. 그들도 공부를 했지 않겠는가? 다만 취직하기 위해서, 딸랑, 딸랑딸랑, 그것만 워낭소리처럼 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김유미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꾸냥 좋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것 같으나, 탤런트 김유미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문장이 가볍게 위로 흐르는 것이 듣기에 좋다. 우리는 그런 목소리를 원한다. 우리는 싸운다. 싸움은 정말, 그 말이 싸움 같다. 배움이 정말이지 배움 같은 것처럼. 사도 바울이 원래는 사울이었다가, 믿음으로 개명한 것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싸움에 가깝다가, 드디어 배움으로 나아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겠는가? 맞겠는가? 맞는 것이 두려워서 틀리겠는가? 우리는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스페이스를 느낄 수 있다. 감지할 수 있다. 우리도 대게의 경우, 싸움에 노력하다가, 배움으로 안착하기 때문이다. 학원 영화 드라마가 없는 것이, 우리 옛날에는 사람들이 민주화 시위를 많이 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니, 몇몇 선각자들이 밤낮으로 학원 드라마를 만들고, 수준 높은 불륜 영화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학원 드라마는 시내에 나가 돈 주고 봤고, 그렇다고 많이 보는 것은 아닌, 심정적인 동조자. 수준 높은 불륜 지금 보면 매우 국정원적인 영화는 동원 극장에서 많이 봤다. 나는 어린 시절에도 외로웠고, 그것은 정신이 먼저 그랬고, 육체도 마찬가지였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를 나는 잘 보지 못한다. 나는 뭐든지 잘 보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원룸에 살면서, 비판적인 자양분이 많이 가라앉은 다음에는, 눈높이 교육처럼, 때로는 넓은 가족들의 문제처럼 잘 보아줄 것 같지만, 혼자 있을 때는, 비좁아지고, 그것은 의식도, 정신도 마찬가지여서, 조금만 틈이 생기면, 나는 그냥 달리는 고속버스에서도, 마치 이은결의 마술처럼 나와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애타게 그리워하는 꾸냥이기 때문에, 제이티비씨 네이버tv 가끔 본다. 나처럼 보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본방사수를 못하고, 제이티비씨 네이버티비로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번에는 김유미가 울었다. 아주 방송 언론에서, 이게 어찌된 영문이냐고 내게 항의 섞인 타전을 해왔다. 나는 순자의 원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의 대종상 같은 타박상을 아주 많이 받는 편이다. 나는 그때 공간을 비행하는는 야트마한 종이비행기?가 되어서, 조심스레, 한올한올 가로지른다. 관리하고 싶어서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주 울기 때문에, 나와 같은 사람일까 싶어서, 그러는 것인데, 또 생각해보면, 계산해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이다. 여자들은 꾸냥 운다. 그것에 프레드릭 제이머슨, 정치적 무의식을 파헤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여자들은 삶이 꾸덕지고, 그래서 학교 언저리에서 꾸냥 운다. 남자가 있으면, 대충 들어맞으면, 그것의 격정이 배가가 된다. 그것이 또한 꾸냥 우는 것이냐? 꾸냥. 무슨 일이요. 무슨 일로 이렇게 우는 것이요. 그것이 중국어인지 한국어인지 어느 때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 회의 것이, 제이티비씨, 그것의 코러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의 화면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데에서는 김유미의 힘있는 문장 진행의 목소리가 나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없다. 그냥 어떤 카툰 네트워크 같고, 피디가 그냥 컷 외치는 것 같고, 사람들은 모나드에서 모나드로 책을 가슴에 품고 서둘러 뛰어다니는 것 같다. 가끔 매점에 가는 불멸의 사진들. 그것의 초반 것들도 나름 굉장히 좋았었다. 그러나, 마치 우리는 배움이 있고, 그 이상을 하지 못해 힘들다는 것처럼, 몇 개월에 걸친 내용들이 내게 접수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내, 디도 내 친구가 내게 달려와 알리기를, 무슨 일이냐고. 유미가 어째서 우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 꾸냥의 원인이 내게 있어야 한다는 것에, 때로는 영광을, 때로는 사랑을, 때로는 어처구니 없음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고, 그것의 영화로움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가, 너무 좋았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신춘문예와 문단, 각종 시문학상에 지친 우리에게, 마치 화면적인 이데아에 그것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의탁해놓는 듯 하다는 것. 결혼이라는 어느 결혼도 안해본 학생의 시는 그것의 라임이 너무나 눈에 보는 것처럼 정확했었다. 나머지의 사람들이 시가, 김남주의 정신까지 생환하여 온 듯한 시가. 그 뜻 밖의 종합적인 만두소들. 묘한 데서 터지는 알 수 없는 욕망들. 그렇다. 시라는 것은, 도덕이기에 앞서 욕망이니까. 사람들은 아는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다만 시를 읽고 그치는 차가운 무정의 세계에 있지 않게 할 것이다. 유미를 어떻게든, 해볼 것이다는 기대 심리를, 학교 전체에게 갖게 할 것이다. 사람은 생각을 대체 무엇으로 행하고, 저장하고, 만두소를 빚은 다음에, 다음 사람에게 먹이고, 저녁에는 막걸리를 먹자는 약속을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 어떻게든지 화답하고, 화답의 이유가 뽀뽀나 껴안기나 마치 문화부 장관의 위치에서 시내로 영화 함께 보러가기를 명령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다가, 영화 보기까지를 계획하는 것이다. 시가 하나 피면, 나는 반드시 집을 짓는다. 그것의 습관은 대체, 어디서 기원하여 발로하였는지 알다가도, 스페인의 영화 감독 알모도바르 모르는 것이다. 약간, 일본 애니 토토로에서도 표현된 것이 있다.

 

우리에게는 꾸냥이 없다는 것.

다만 경쟁적인 꾸미기만 있다는 것. 소비의 자랑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어째서이겠는가?

 

 

그것의 종합적인 만두소가 분명 감지가 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매우 많이 없다는 것에 우리 지구의 비참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