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의 소재주의적 역사적 전의식에 관하여
사람의 말이 태초를 만질 수 있을까? 무슨 말이냐면, 아픔이 통과하는 시간과 거리 같은 것. 어떤 사람이 자기 병을 나중의 과학이 해결할 것으로 믿고, 냉동하였다면, 티라노의 발톱 아래서 얼음처럼 쪼개지는 지 어떻게 아는가? 이 무시무시한 역사관. 안평대군의 시간에서 아버지의 소망을 온가족이 거들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경기도 양평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좀더 진행하는 문장이 되기가 어려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가볍게 해당사항이 없음이 되기 때문이다. 인물성동이론에 관한 호락논쟁이 있다고 오늘 책을 읽었다. 물성은 물성으로 있지 않고, 인성과 결부된 물성으로 있기에, 그와 같은 케이스는 우리가 아는 인성으로 그와 같은 인성과 결부된 물성이 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을 것이다. 리'는 그것의 문과 같다. 인성이 우리가 아는 수준으로 되지 못하는 칠정이지만, 그렇다고 다버리기가 뭐한 것이 있는 것이다. 태초는 얼음 인간과 같다. 우리는 태초를 모르고, 얼음 인간도 그것의 비개인적 본성으로 인해 자기 있던 시간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태초도 버리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작은 생체기 고통을 당할 때, 이런 우라질, 이런 태초 하기 때문이다. 우라노스는 그리스어로 하늘을 가리키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 파테르 헤몬 호 엔토이스 우라노스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위대한 철학자 주희는 대체 무엇이 자기 인성을 팔아가면서 구하고 싶었던 물성, 인성을 구하는 역전적 가치로서의 물성적 대상이라고 했던 것일까? 격물치지. 태국에서 물축제를 하는 이유도, 서로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기원해주는 것이 유래가 되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이뚜잉은 그렇게 해서 공책과 펜을 선물받고, 돌아가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첼로 음악을 흐르게 한 뒤에 태국어 공부와 한자 공부를 하는지 모른다. 불빛이 우리 눈에는 조금 어둡다 할 수 있고, 그것의 리, 아니다 기다 할 수 있다.
세계에는 고대에 이르도록 눈이 휘둥그래지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으나, 아픔의 태초 리에 대한 경험이 없으면 그것은 다만 그릇된 것도 틀린 것도 나쁜 것도 아닌 未發의 상태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닮은 것을 지금의 정보통신의 시대에서는 그렇게도 잘 찾는데도 불구하고, 고건축의 위대한 정신들이 서로를 조금도 모른 채로 조선총독부 한동안 우리나라 정부 건물이요 역사박물관이었던 것 안에서 어린아이가 한 명 커서 공부를 우주론적으로 잘해서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는 가설에 대해서는 프라보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일본만화 보노보노의 주인공들이 그 정도의 역량을 갖고, 역사에 남지 않기란 게, 사단칠정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건축만 건축만 그렇게 잘하고는 사라지는가? 우리나라에서 밥도 먹고, 국도 먹고, 물도 먹고, 막걸리도 아주 두세 그릇씩 연거푸 먹던, 결국은 술그릇, 민중적인 차원에서, 그것이 고대, 상대적인, 일본에서는 그마저도 귀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본성이 없었던 것일까? 일본 사람들은? 얇은 술그릇이 중국에는 있었다. 얼마나 한국 사람들은 막걸리는 백양사 연못처럼 마시고, 청주나 정종 같은 것은 송광사 커피자판기 종이컵처럼 마셨는가? 일본 사람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안평대군이 되었고, 행동의 규약만 집단적으로 넘치게 되었다. 그것은 권력, 지배, 문화와 불편함의 예술 같은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겨울옷도 잘 입고, 여름옷도 잘 입었으면, 자기들은 저기 태평양 원주민들처럼 헐벗는 기질이 있다고, 거짐 다 벗고서 일도 하고, 축제도 벌이고 했던 것일까? 그것의 매개는, 다만 인간리 같아서, 한국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다. 결단하고, 주장하는 사람이 태극이요,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사무라이 사단들이요, 잘 모르고 그렇게 어려서부터 살고, 웃고, 추운 날에 손님 대접하고, 떡을 해서 나눠먹던 일본 사람들이 맹자와 같은 성선설의 한없는 미발이다. 지금처럼, 한국 복식이 아름답고 좋으면, 대국이 입고는 자기가 먼저 입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루마기는 말과 발음이 몽고의 이름 같기도 하다. 지금은 음식의 이름이기도 하다. 화수분에서 가족이 서로 벌판에서 상봉할 때 입었던 옷은 민중의 옷이었고, 그들의 안평의식은 조선의 양반들을 닮았다. 아마도 두루마기를 걸쳤을 것이다. 그것은 옷감의 낭비이기도 하고, 수학적으로 보면, 도포와 더불어 어린아이 옷을 하나 더 지을 수 있는 분량의 것이다. 우리는 꽤 거세게 단발령을 거절하였는데, 그것은 정말 미발 중의 미발이요, 존재의 어쩔 수 없는 기발이 아닐 수 없다. 속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 속하는 것이 좋은가? 리는 반드시 태극과 발음이 많이 유사한 태초인 것이다. 태기는 어쩔 수 없이 임신하는 것과 같고, 그것의 고통은 유증유의 지속일 뿐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군자가 있어서, 친구가 많고, 학교가 항공모함 같고, 사회적인 비젼이 나가수와 같다 한다면, 그것만큼 완전한 리의 太劇이 없다. 그것으로부터 조금 부족한 사단이요, 그것으로부터 조금 부족한 미발이다. 동양권에서 음양오행을 말하고, 사진을 찍고 주유하여도 되는 행복한 세상. 그 아찔한 차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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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매우 궁금해 한다. 지구라트라고, 옛날 바빌로니아? 유적은 황량한 벌판에 마치 처음부터 버려질 것의 것으로 있는데 비해, 솔로몬의 성전은 무엇인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아닌게 아니라, 내 대학교 때에 여자 친구가 그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그리고 연상하려고 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가볍게 들렸고, 열정을 높이 샀으나, 대신에 바닷가에서 점수도 많이 빼앗겼다. 여자들은 피부와 예쁜 얼굴이 생각의 유선형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작은 말의 실수에도 낙폭이 커진다. 노래를 굉장히 잘 불렀다. 나는 또 내 여자 친구의 아름다움을 왕의 의자에 앉아 누자구 없이 과시하였다. 그런데 고구려 한 왕이, 말을 타고 세상의 모든 숲과 그림자를 도는 것처럼, 자기 지배하는 나라를 돌다가, 신비로운 공간을 하나 발견하고는, 자기가 죽거든 그곳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솔로몬의 궁전은 안평대군되고, 플라톤의 철학은 우주를 상실한다. 우리는 삼국사기가 독자에게 어떻게 진행하였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설인귀의 편지는 내용은 하나도 없이, 왠지 모르게 따뜻하다. 한자를 고어체로 열심히 쓰면, 내용은 하나 없어도 그런 것을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은 욕망 영어로 디자이어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고구려왕이 발견한 아름다운 곳은 우리에게 다만 작은 도서관처럼만 보이는 것이다. 도서관을 위한, 도서관만을 향한 그와 같은 리는 무엇인가? 그와 같은 유학은 도덕지향적인가? 아니면 정치지배적인가? 아니면 다만, 개인의 성리학적인 것인가? 훗날에 장자의 이런저런 주장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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