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 '바람 앞의 개화기 역사 인물 탐구' 박규수편: 자본주의적 보편성과 정당성
펀잡의 마지막 행보는 무엇일까? 지명을 획득하는 것이 아닐까? 조선의 임금은 토호를 잡고 있었던 것을까? 부호와 친교했던 것일까? 아니면 식자들과 연합했던 것일까? 합종연횡. 나는 나다면서 일렬로 날아다니는 개오리들. 마을에서 나의 음부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던 개개. 오리는 복수형어미. 개는 하찮음을 뜻하는 접두사에다, 특정 동물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서의 개. 조선의 임금은 누구와 무의식적으로 가까웠던 것일까? 궁궐이니까 궁녀들일까? 건축은 토호도 아니고, 부호도 아니며, 식자들도 아니다. 그것들은 죄다, 이지러진 진주이다. 진주 조개잡이. 슬픈 음악. 우리가 물을 입에 가득 머금고, 미운 사람이 조금만 웃겨도, 웃긴다고 침과 함께 내뱉으면, 침은 복수도 아니고, 경복궁, 입을 다물었다 해서 단수도 아니다. 그것은 개복수...... 우리는 태초에 셈을 못하고, 박규수, 이렇게 저렇게 자극이 많으면, 개복수가 되곤 한다.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무슨 지혜일까? 아무 것도 없다. 그냥, 하늘아래서, 그 한 뜻 밖에 없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
그래도 바하는, 필순이가 병호에게 그렇지 않다는 변호를 받았던 것처럼, 그것의 혈루증, 환자수호조약, 바하는, 바하는 그렇지 않다. 바하의 음악은 서양의 아름다운 고건축에 형태적으로 의지하고 있고, 엄청나게 보편적인 인물인 키타 박큐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납득하고, 처리할 것인지 고민하는 조선의 임금의 주체에 시니피에가 던져져 있다. 서양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맑스가 그렇다면 틀린 말을 한 것인가? 그는 철학도 하고, 경제학도 했는데, 맑스 만한 경제학자가 지금까지 있을 수 없다는 지식의 공멸상태. 다만 자본을 투명하게 하고, 사업가가 인도주의적인 무차별적인 하나님의 익산 로고스 때문에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고, 내일이 그래도 지속되는 것이다. 그는 철학을 두고 경제학이 없다 말하고, 여자들의 보편 같은 것, 이것은 생활 세계 깊은 곳의 풍경, 풍경 소리는 복어의 배를 갈라, 말려서, 걸고, 북채로 안을 자꾸 두들기는 행위. 둥기덕 경복궁, 경기덕 둥더러러러. 쿠동쿠동. 밀크 쉐이크. 사랑해요 밀키스. 왕조현. 남자는 별로 관심이 생기지 않는, 자연주의적 지식 성리학. 우리에게는 기쁨이고, 적들에게는 언제나 호로이다. 그러나 그 경제가 눈 먼 경제이고, 정치 폭력적인 복수 경제일 뿐이라는 폭로가 맑시즘의 요지이다. 보자. 호라. 지금의 미국 영화가 다분히 그렇지 않은가? 맑시즘이, 맑음으로, 정의 성리학으로, 순발력 넘치는 집필 프랑스 문화로, 결국에는 사랑과 정의의 영화와 그것의 손쉬운 흉내가 있는 거리를 이름에서 내비치고 있다면, 박규수는 대체 무엇하자는 천지현황인 것인가? 어느 일본인 천자문학자의, 초심자는 갈무리하고, 특별자에게는 아부하는 행동이 그러했다. 맑시즘이 가리키는 것이 그것이다. 폭력적인 지식 어른들이, 어느새 불시착의 내부를 갖고 있다가, 마침내 나쁜 친구들을 만나 폭발하고, 남의 두려움을 재산 삼아, 군거잡혼하려고 할 때, 그들이 아무리 재산가이고, 갖가지 문화장치를 갖고 있다고 해도, 썩은 물에서 살 수있는 생명체가 한정되어 있듯이, 있는 재산은 숨기고 공산당 무력 투쟁 같은 것을 하려 한다고 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 그것의 결과는, 칼날 같은 시간에 이르러서, 매우 직접적이고 또한 참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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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는 매우 많은 잔잔한 거울을 갖고 있다. 이이화의 글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개화기 사상과도 사단칠정하고, 위정척사와도 연합한다. 만동 어쩌고 하는 것에도, 대단히 보수적이고, 나이가 들어서 여기저기 걸터 앉아서 최종최후의 들숨날숨을 쉬는 코모도도 제법 괜찮다. 없는 것에 비하면. 없다는 것은 그래서 생각보다 심각한 형상이다. 재산을 예쁘게 갖고 있다가, 남의 것도 같은 맑스 이전의 미발적인 보호석상에서 보고 있다가, 결혼을 했건 안했건, 갑자기 스트리킹 하면서 뛰쳐나오는, 액션 같은, 원형적인 형이상학이 우리 인간에게는 있다. 실제로 박규수는 제갈량처럼 없는 것 같고, 배를 타고 섬에 접근하면, 섬이 갑자기 일어서거나 딴짓하거나, 형태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개박규수 그 거대한 섬이 잔잔하게 세상살이를 중얼중얼거리는 절대적 무능력에 우리 모두가 보편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배편자들인 것이다. 사람들은 안가면 된다 할 것이다. 쿄토로 가면 되고, 만세전을 읽으면 된다 할 것이다. 그래서 이이화가 세 단계로 그 개인의 삶을 분석한 것이 눈에 들어오고, 마치 시황제의 고전 시경에서처럼, 젊은 날의 신부처럼, 어느 지역의 토호들이 양민들의 경제를 약탈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맹렬하게 쓸 때가, 그 선비와, 생각이 보기 좋은 뿔 같았던 한 유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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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휘니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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