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유일의 언론 첩보 영화. 모비딕(2011)을 역사구조적으로 접근하면
주여. 돈호법. 돈이 이렇게도 모든 마음의 초장부터 좋은지. 돈은 좋다. 내 친구 현정이와 영화보던 때. 둘은 손도 잡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 그 관계와 음향과, 영화관에 나란히 앉는 포지션이란 것은. 영화는 미국 영화의 것이었다. 재산과 배우, 시간과 기독교 신앙은 유엔의 것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안보리, 미국 사람들이 나오고, 미국 말로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 사람이 사람의 세포 저기 안쪽에 박혀 있는 깨끗함이라는 것이고, 나머지는 핍진함. 피로함. 법률적으로도 질리는. 그렇다면 나라도, 영화를 미국에서 태공조에 적당히 아부하면서까지, 아직은 미지의 장르이니까, 예술적 완벽성을 한번 시도하였을 것이다. 그 사적인. 황사. 역사는 사적인 것의 통과에서만 비롯하는 것인가? 기계장치의, 더불어 공교육 시대에서.
어린아이에게 역사 흙에다 글씨를 쓰고, 설명을 한다. 왜냐하면, 과자 같은 것을 준다고 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선생이 야사시해 보이고, 마땅히 다른 할 일이 없으니까, 충장사 안쪽의 정원 같은 데에서 듣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 탐구. 역사 탐방. 영화 모비딕은 그것을 공격하였는 것인가? 역사는 위인과, 그들의 유적, 그리고 저작 같은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기인 열전. 사람들은 피로와 관심 속에서 관심의 볼륨을 높이는 것이다. 기인도 피로하다. 스스로의 볼륨을 높인다. 생명은 수맥관지, 처음 쓰는 사자성어인데, 다른 사회적 관계가 하나도 없이, 햇빛과 지엽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숱한. 조금만 언덕에 오르면, 우리 산야는 온통 지엽적인 것들의 총화이다. 손도 흔들고, 유치환의 바위도 있다. 그것은 고등학교 교육으로부터 독립해 있다. 그러다가 꽃을 피우면, 우리는 내일의 피로를 알지만, 당신의 기회 같은 저녁 발걸음을 기억한다. 마광수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한 것은, 내가 나는 예쁜 여자가 좋다 하는 것에 대한, 불문법적 돈호법에 대한 심리 깊은 개인적인 공격이었을 것이다. 현균이는 너무 예쁜 여자만 좋아한다고. 예쁜 건물. 예쁜 음악. 예쁜 문학. 예쁜 기독교. 예쁜 옷. 예쁜 버스. 예쁜 영화. 예쁜 현정이. 예쁜 글씨. 예쁜 안현옥. 순전 다 예쁜....... 야하다는 것은 평등권과 같은 것이다. 이 영화는 국정난맥상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가능태에도 분명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는 파멸하며, 불꽃 놀이는 절대적으로 야하다. 돈만 들인다는 소문. 그래도 무조건적으로다, 앞다투어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그러다가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마광수의 대수 시집을 가슴에 품고, 언급이 파행하여도, 대수로서는 반드시 그림자가 있는 것이니까. 그림자 빌려오기 같은. 그렇게 죽는다는 신문 기사가 있는 것이다. 영웅들은 어디에 있는가? 선생은 월화에게도 감동을 주었던 방식대로, 역사적 영웅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만, 우리들은 신현균의 어법 그대로 조개종 같다. 관족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의사소통행위이론...... 오 마이 갓. 오 이론.......
그렇다면 구조는 무엇인가? 역사가 사라지고, 프랑스 구조주의가 나타났다. 나는 아직도, 그 봄날의 도니체트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잊지 못한다. 무식하면 역사도 없는 법. 그 날카로운, 가슴 깊은 검흔......
우리는 이와 같은 낭만을 위해서 돌진하여 오지 않았다. 시지푸스가, 야스퍼스보다 그런 도리어 한계상황을 내비치고 있었다. 프랑스 구조주의가 아무런 장애 없이 납득되었던 것도, 다만 어학을 중심으로 해서가 아니라, 까뮈의 시지푸스의 신화가 고등학교 삼학년에게, 그리고 대학교 일학년 일학기 동안에 너무나 매력적이어서였을 것이다. 모든 솥은 누르고 딱딱한 데를 만들기 마련이다. 빵도 그렇다. 빵은 도리어 그와 같은 방식을 추구한 것일 것이다. 솥은 실상이고, 빵은 우리들이 신앙하는 예술혼이다. 음악은 거기다 생명을 불어넣고, 하나님은 천지창조 이후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시지푸스가 실패하는 이유도, 뾰족한 산꼭대기에 거대한 둥그런 것을 안치시킬 수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의미로서 철학적 수필을 받아들이지, 그것의 영화적인 묘사 가능성을 따지려 들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사 드라마의 물결 치는 배경 음악을 깔고, 홍위병들이 작고 붉은 수첩을 들고 흔드는 것처럼. 그것은 역사의 廢奏가 아니라, 사랑이 사회적인 것으로, 철학적이며 청년적인 동년배적인 것으로, 관료와 쓸데 없이 기다림과 누적되는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수업이 체제종속적인 것을 은근히 강요하여, 가르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책상을 발로 차고 나가는 쓸쓸한 유리왕의 혼자만의 결단의 몽환 같은 것으로, 거대한 광장의 느낌 같은 것으로, 수많은 가난한 기질들의 태극 같은 것으로......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문명들과 하급 토대들의 앙상블로써, 사랑이 성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한발짝만 움직여도 산소가 사라지는 듯 마음은 극심하여진다. 중국에 홍위병들의 사진이 있는 것처럼, 판화 미술가들의 잔잔한 업적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화생방 교육이라는 것이 있다. 역사는 시니피앙처럼, 구조는 시니피에처럼, 처음에는 방독면을 쓰고, 제도와 교육과 자기만의 독서를 추진하는 것이고, 신약으로 넘어가서는 방독면을 벗고,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면서 오감 가득 자기의 기로써만 전진하는 것이다. 기가 전진하면, 리가 되지 않겠는가? 서울에서, 대도시에서, 사람들의 비자연적인 향기들만 모아도, 영화처럼 화생방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잔인함이기도 하며, 도로에서의 자기 목숨을 모든 것을 내건 싸움이기도 하다. 여자들도 하이톤으로 질 수 없는 사진이다. 어째서 호프집 같은 데에서 시인을 구하는가? 기가 전진하여도 리가 되지만, 기가 빠져도 리가 된다. 우리는 두려움이 크고, 서울은 친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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