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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황광수 박성준 김주연 신작 서적들을 보면서, 이런 외면의 딴 데 보기 같은 글쓰기가

by 마음대로다 2012. 11. 24.

황광수 박성준 김주연 신작 서적들을 보면서, 이런 외면의 딴 데 보기 같은 글쓰기가

 

 

 

 

 

 

 

 

박성준은 신진 작가이다. 그래서 경로사상이 희미한 형이상학인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계열로 놓기가 그렇다. 그러나 김주연의 글도 그렇고, 황광수는 내가 처음 듣는 사람이며, 박성준은 내 오랜 친구 같은, 공부를 늘 인디 밴드들과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얻어내는 사람 같아서, 머리 속으로 어떻게든 들어가면 별 차이가 없어보인다. 이것은 김주연 교수보다도, 황광수 교수에게 도리어 반기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젊게 보인다는 것. 약력을 읽지 않고 보았는데, 굉장히 드문한 것들이 많아도, 단권 강하는 느낌이 있었다는 것이다. 양명학은 태공조의 기술이다. 함부로 남발할 것이 아니다. 문예비평은 비평의 대상과 같은 사람일 확률이 높다. 김주연 교수의 글이 일맥을 이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해도, 편혜영이라는 소설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색깔 면에서는 도리어 후퇴하는 듯한, 케리그마적인 문장들에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좋은 어시스트이지만 그것이 기본인 자장면 보통에 단무지와 김치 같은 사람들에게는, 인용된 문구가 좋게 보이는 시각적 현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문에, 김주연 교수도 젊어보인다.^^ 젊다는, 점다. 절다. 장기의 卒 같은. 모자 쓰고 웃는. 박성준의 巫라는 시가 그런 의미에서 한자의 높이를 갖고 있다 하겠다. 한자는, 한자만 높아도, 인정해주는 도니체트 상의 대상자이다. 그러니까, 학제가 있고, 학벌이 있고, 약한 내력을 사람들에게 으으으 내비치고 해야 사람들이 알아주고, 가치를 인정해주며,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라는 한자 시 하나만이라도 높은 공각기동대의 구멍에서 연원하는 것 같으면,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물건을 보다 보태주는 생활상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황광수 교수와 김주연 교수는 운명의 수레바퀴, 인문학의 원환 구조에 충실한 것이다. 황 교수는 문예비평이 유사 철학적인 관념을 무한하게 내뱉어야 한다는 의무감, 김주연 교수는 좋은 문학 대상과 지속적으로, 자기에게 든든한 말마디로써 지원하고, 옆원하고, 재칠하는 동반자 의식. 둘 모두, 문학을 대상으로 하고, 평을 귀에 뚜렷하게 하며, 이야기적 문학성, 문학적 이야기성으로의 종합적 귀결에는 실패하고 있다. 보다 엄격하게는, 김주연 교수는 실패하고 있고, 황광수 교수는 미래를 약속하고 있다. 계속해서 열리는 문처럼, 실패하는 것도, 그와 같은 치열한 보이지 않는 경주가 있다는 전제 자체는 그것 제귀대명사가 학교이며,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 미세하게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신비한 교회이자, 이뮨시스템, 죽음의 높은 관이겠지만, 실패하는 것도 문학이고, 특히 미래를 약속하는 것도 제법 한 문학이지 않을까 한다. 다만 지하철의 스크린 도어 같은 무관계성. 범주를 넘어서는 명성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황광수 교수의 첫번째 인용의 시인이, 이름을 잊었지만, 아주 좋았다. 아주 좋은 것이 아니라, 컨디션이 어느 날은 쵝오인 날이 있고, 무등산에 한번 올라가볼까 싶은 기분이 있지 않겠는가? 늘 무등산 아래에 살면서. 그와 같은 기분은 라깡의 표현대로 무가치하다. 귀하기가 이를 데 없는데도.

 

박성준의 무슨무슨 오답하는 시가 있었다. 박성준은 깊이가 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묘하게 기쁨이 있었다. 황광수 교수의 글은, 죄질을 따지는 편혜영적 세계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편혜영은 비평적 관념의 즉문적 형상들이다. 김주연이 옆문으로 돕다가, 결국에는 데모닉한 파우어에 밀리는 것도 그것일 것이다. 관찰자와 쥐의 관계에서, 마침내 쥐가 모든 속성을 거머쥐고, 자기도 또한 움직임이 떨어지는 거대 쥐가 된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도 카프카의 변신보다도 그럴 듯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문학의 현주소일까? 문학과 사회는, 쥐와 냉장고의 밀착 관계, 스크린 플레이로 호소력을 조금씩 잃어간다. 백낙청을 위시한 분단국가 문학이론 같은 것들도, 관념의 유리성이 되어 간다. 차라리 헤겔은 다보탑의 정갈한 항목 같다. 황광수는 미칠 듯이 뛰쳐나가, 김주연을 만나고, 박성준이 옛날 시인 신현균의 시절을 닮았지만, 독립적인 원리를 깨치고 있는 것 같다고 좋아하는 듯 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식민지 이론이라는 것은, 안식민지 이론하는 사람들의 스크럼에서 벗어나서는 아무런 진동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조금 복잡할 것도 같지만. 육체와 실존이 독립하여 있지 못하면, 사회를 향한 객관적인 투기나 투호는, 궁녀들의 리치와 정확히 합성된다는 것. 궁녀들이 공주와 왕비마마와 책을 읽고, 남자들이 하는 것처럼 경연하는 것이면, 모든 교육은 시스템과 가을의 단풍과 같다고, 사대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과 사대부라고 해도 이름만 사대부인 것들의 정신에 못미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일본적인 근대성과, 양복 테일러리즘과, 미국의 문화적 통치 같은 게 있어봐도, 상식과, 미적인 감수성과, 투렷한 시지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높이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황광수는 초조한 것이다. 누가 황광수를 백낭청이나 김우창 같다고 하겠는가? 그의 타임머신은, 분명, 신학을 향하여 있다. 박성준의 시에도 그것이 있다. 계속해서 박성준은 기상천외해지는데, 결정적인 인문학적 원환 구조에서 그의 모자람은, 작품 내에서의 두 도시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치가 조금 삭감된 상태로 가장 잘 보이는 것이, 김주연 교수의 것이고, 황광수 교수는 너무 멀고, 차도 없고, 기름도 없다. 간다고 결심하기까지 너무 힘에 겹고, 전라도적 상태에서 누가 차를 대줄 것이며, 기름 값은 누가 다 부쳐줄 것인가? 석류는 붉은 열매를 갖고 있는데, 종이 조금 남달라서, 희고 투명한 열매를 갖고 있는 석류 같다. 맛은 같은 신 맛일지라도. 대개의 경우, 독립적이면서도 피지배상태일 때 나타난다고 하는 자연 현상이다. 박성준 교수의 문학 비평은, 완벽한 문학적인 독립성, 여기서의 인디펜던스는 전혀 다른 의미이지만, 불가지론적 신학의 오랜 역사에 비추어보면, 형상이 완전할수록, 사람들이 덩달아 건강하고, 키도 크며, 크게 노래하고, 신까지도 찬양하기 좋아한다는 원리에 따라, 내가 지금 처음 말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의 얼룩말 같은 횡단보도가 엿보인다고 하겠다. 그는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학은, 우리나라 궁전의 비원과 같다. 인문학은, 그것의 삼각지, 비원을 걷는 임금 원 원님의 도식적인 종합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