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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나이가 들어서도 영문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떠한 바닷가인가?

by 마음대로다 2013. 3. 15.

나이가 들어서도 영문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떠한 바닷가인가?

 

 

 

 

 

 

 

 

하루키가 밀물처럼 우리 대학가를 장악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저마다 주자학적인 어수선함이 있어서, 학과는 학과대로 한겨레 신문을 받았고, 개인은 개인대로 학생 시위와, 중간자와, 입시파의 삼파장에 시달렸으며, 군대를 가야 했고, 군대 간 오빠를 어떻게 처지해야 하는지, 갑자기 잘나가던 선배가 휴가 때마다 질척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무슨 뜻인지, 은어낚시통신, 알 수가 없어서 어지러웠으며, 나는 남자기 때문에 에스이에스는 좋아해도, 에이치오티는 싫어했었다. 그리고 하루키는 나를 무척이나 닮은 데가 있었다.........

 

한국에서 학생 시위를 하는 사람이 하루키의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러니, 레플렉션이, 선반이 제법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키가 작아진 것일까? 백제의 상상공간에서, 아니면 선반이 조금 상승한 것일까? 우리는 공부를 어디에서 마무리하고, 글을 쓰는 문화 정보 통신의 국가에서, 정보 통신이 아니라 실은 문학 문화, 글을 쓰는 권력자가 되는 것일까? 던지기만 하면 들어맞는 다메섹 도상. 바울이 다메섹을 가다가, 눈물로 앞을 볼 수가 없었고, 거기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지금의 정보 통신 문학 문화에 비추어봐도 훌륭한 전선 같은가? 만일 강철이, 쇠줄이 수십겹으로 감긴 것이 되면, 지능이 생기고, 엿이 수십번 늘이고 늘이면 맛이 있어지듯이, 그것을 인간이 도달하지 못하는 높이에다 놓고, 일년 내내 햇빛을 받게 하면, 거기서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 나온다고 치자. 그것은 그럴 듯 한 것이다. 다만 우리가 김치만을 먹어서, 그와 같은 높이에서,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다. 의리가 있고, 마음으로 간음해서, 아이리스, 아이가 없는 세상에 그나마 사생아일지라도 인구수가 국민 생산에 이바지하게 된 것이 아니다. 눈물은 앞을 가린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문소설은 아무런 주소지가 없다. 역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