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학문은 藥學이라는 명제에서 보면, 야마하 신보 볼트(bolt)는 괜찮다 싶다.
어려서 한약을 잘못 먹어서, 얼굴이 붓거나, 남이 잘생긴 커트라인에 못미치는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를 일생에 몇 번은 접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물결은 상당히 심장하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잘하거나, 지식소가 자연스러운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소원하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작가라면, 매우 똑똑한 여자를 두고 사는 것 같은 것.) 그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바보처럼 곧이곧대로 죽순처럼 여기곤 한다. 몸이 아파서 예를 들면 성장을 못할 수는 있다. 도리어 약을 써야 할 때 쓰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인지, 비유인지, 경계가 또한 애매하다. 우리에게는 키 측정의 주치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이 부었다는 표현이 있다. 이 자식 간이 부었구만? 하는 경우, 단 한 번도 그 부은 간을 본 적이 없다. 너무 독한 약을 써서, 키가 자라지 못하거나, 얼굴이 기대에 못미쳤다는 사실은 그래서, 복합적인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하나하나 복합되면, 우리는 복합영양제로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사회의 힘이다. 그러나 엄격함은 살아 있다. 약 때문에 기대에 못미치는 것보다, 약을 쓰지 못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성을 놓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환타 음료의 시간을 상상해보자. 셰익스피어는 잠자는 중에 그것을 본 것일까? 아니면 풍토병에 걸려서, 지식소가 다녀간 것일까? 아니면, 완전한 튜브탑을 한 뒤에, 내 식대로의 표현으로, 아파 누워 있는 사람을 본 것일까?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 건강해야 하는 신세계의 청년들로만. 액션이 하나도 없는 복합 안에서, 무슨 몬테규와 캐플롯의 앙가주망이나 전투가 있었겠는가?. 고향의 심순애는 공부를 많이 했고, 자기가 감기약을 구해다 그녀의 몸이 낫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랑은 다만 문신 같은데, 약도 거절하고, 문신이나 문지르고 있으니, 약을 먹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사랑의 반도체가 일천하고, 선할 가능성이 하나도 없으면, 바깥 일이나 시키는 것이 나은 것이다......
약대는 카멜, 카멜들이 줄지어 대상행렬을 하는 것을 우리는 가끔 상상하곤 한다. 나만 한대도 상관 없다. 어려서 교회 공동체 표현에, 약대 약대 하는 것을 나는 늘 그냥 약학대학으로 상상했다. 그래서 전남대 후문에 가장 눈에 띠는 것이 약대 건물인데, 볼 때마다, 약대 스티커를 붙이면서 웃고, 저게 약대라니 저게 약대라니 했었다........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영화가 매드맥스이다. 그리고 할리 데이비슨은 옛날부터 서부 사막지역에 사는 게이들의 것이라는 생각의 유산이 우리 어딘가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코만도는, 그 왕만두 같은 몸짓으로,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로켓포를 어깨에 매고 발사하는 쾌감을 갖고 있다. 창과 칼을 녹여서 낫과 곡괭이를 만들자고 했던 이사야의 외침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장식용 칼을 그렇게까지 법률로 소지를 금지하지 않는 이유가 또한 그것일까 한다. 곡괭이도, 낫도, 어느 슬픈 시간의 끝에서는 분명 흉기로서 보고서 작성이 되기 때문이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일반민중문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차세계대전과 영문학의 생산성의 문제. 맑시즘과 나치즘의 문제. 다 문제....... (0) | 2013.03.23 |
|---|---|
| 사진 (0) | 2013.03.19 |
| 나이가 들어서도 영문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떠한 바닷가인가? (0) | 2013.03.15 |
| 혈적자(2012): 거대한 중국의 에이도스적 원인론에 내가 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0) | 2013.03.13 |
| 지금 우리나라는 '최고다 이순신' 드라마 제목을 갖고 설왕설래 말이 많다. (0) | 2013.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