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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트릭 1 마지막 회에서의, 우리 코뮨들의 슬픈 비폐쇄적인 공간적 반영과 의지

by 마음대로다 2012. 6. 14.

트릭 1 마지막 회에서의, 우리 코뮨들의 슬픈 비폐쇄적인 공간적 반영과 의지

 

 

 

 

 

 

 

 

나는 竹故十語島 죽을 수가 없다. 부생아신, 내가 낳은 일본영화라는 소설이 있고, 모육오신, 그것을 예언하고, 나의 소설을 받아준 영화와 드라마가 있기 때문이다. 러브레터.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아는. 사월 이야기. 트릭. 그리고 시효 경찰. 그들은 누구인가? 나는 일본 영화를 쓸 때, 그곳은 한신대 본관 대학원 전산실에서였다. 창은 높은 곳에 있었고, 벌판이 내다보였다. 사람들이 그 때에는 몇 명 있었고, 그 중에 누군가 해찰을 했다. 그때 나는 소설을 로봇처럼 한 편 뚝딱 쓸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시절의 나의 몸과 마음이, 안과 밖이, 그것은 혹시 영문학 계간지, 창비에서, 문사로, 문학동네를 하나 맞힌 뒤에 맞는 듯한. 쓰리 쿠션. 젖어 있었기 때문에, 삼성이던지, 엘지던지, 들어가서 글을 쓰면 세탁이 되는 트롬 세탁기 같았다. 세탁이 되는 것도, 즉자대자적인, 안과 밖일 것이다. (우리는 헤겔을 영원히 읽을 수 있다. 대학에 들어가기가, 대학 대중이 어려운 것이다.) 유키 구라모토의 두 로망스를 대놓고 배경으로 삼았고, 그것의 고통스러운 결여를 내 강한 팔로 잡는 듯 하였다. 나는 순간, 일본말만 못했을 뿐이지, 그것은 국민의, 국가의 구성요소인가? 어디까지, 모라우조, 바닷가인가? 일본영화는 내게 자연과 같다. 쓰고 난 뒤에 특별하다는 인상이 없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그러나, 내가 공부를 게급적으로도 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다소 무시한다고 하면, 물론 어느 누구도 그러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를 무시할 것이다. 나의 외로움은 바로 이와 같은 구조로 인해서 발생한 것일 것이다. 그들은 나를 무시하지 않는데, 나를 무시한다고 해서 내가 무시하는 것 같은 두려움에서. 그래서 처녀지로 남고 싶은 마음에서. 연락도 안하고. 세상 누가, 러브레터와 사월 이야기, 트릭과, 시효 경찰을 비평할 수 있겠는가? 비평은 비판 같은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내게서 배운다. 양명이라고. 왕양명이라고. 실제로 비판이 아닌 비평들은 많이 있다. 우리들은 그것을 주례사 비평이라고 부른다. 나는 읽지 않았다. 시간도 없었지만, 그런 것을 읽는다면 공기가 빼앗기는 듯한 부정적인 의미에서 적극적인 스페이스가 발동하는 것 같다. 그러나 국문학과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간절하고, 내가 주례사 비평까지도 읽지 않은 것이 미안할 뿐 아니라, 그들이 팔이 짧고, 목이 없고, 가끔은 아무 말 없이 옆으로 걷고 있을 것 같아 걱정스럽다. 처녀지처럼. 서로가.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인가? 아무도 러브레터를 비평할 수 없다. 나의 소설이 그것을 비평한 것일 수 있다. 작품의 감상적 길이는, 엇비슷하다 할 수 있다. 물리적 시간 뿐 아니라, 그것의 잔영이, 꼭 내 소설을 영화로 본 것 같은 착각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일본 영화 철도원도 사랑한다. 일찌감치 나는 그들을 그림자로 분류했는지 모른다. 영혼과 재산의 침범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독교적인 친교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행여 부유하다면 내게도 좋은 영향이 생길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역사는, 사람들을 고고학적 시간과 지식으로다 빠뜨렸다. 그것의 분위기 환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도, 그 네 가지의 영화와 드라마를 비평할 수 없다. 내가 한가할 때, 내가 컨디션이 좋을 때, 내가 천국 같은 시간을 보내고, 인류에 대한 의무를 내달리고자 할 때, 그것은 다시금 꽃이 되고, 꽃이 되고, 꽃이 된다. 막 꽃이 된다. 비로소 우리는, 감상적 초월에서 벗어나, 문법이 내비치는 대상을 향해, 벗꽃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일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양 문명이 하강 국면을 겪는 것은, 일본이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본적인 언급에서 실패를 지속적으로 맛보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거리는 깨끗하고, 코너는 센치하며, 애니는 원령공주 같고, 오에스티는 환상적이다. 가면라이더를 일부로 재미 없게 만들 수 있다. 나는 글을 일부러 재미 없게나, 메시지가 없는 것으로 쓸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하심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롭다. 재미 없게 만들고, 인상을 찌푸리게 하며, 그것을 보고는 우리 슬픈 산케이는 좋아라 한다.  

 

나는 나카마 유키에가 내게 올 줄 알았다. 그것은 뜻이 다각적이다. 내가 시골 청년 같았다는 것이고, 내가 그와 같은 착각의 클래스에 있었다는 것이며, 나카마 유키에도 반드시 그렇게 생각했으며, 출연진 모두가 그와 같은 한 마음이었다는 것에서, 한정 노동에서의 귀한 잉여를 서로가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가수에서 가수들이. 떨린다고 했고, 그 떨'이라는 한글은 사람들을 정말 떨리게 한다. 내가 서울 영문학과 대학원에 떨어지고, 급격히 인클리네이션될 때였으며, 전세계의 방송과 영화가 모두 나의 그와 같은 경사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노력할 때였다. 하지만 헤겔이 어딘가에서 말한 것처럼, 사상은, 생각은 문장이지,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늘 그 이상의 것과 관계하며, 마침내는 주변을 무질서하게 만든다. 나는 그 순간 어느 즈음에 지사츠를 결심했었다. 그냥. 그때는 그런 생각이 내추럴하다고 여겼다. 그때 나의 생각은 유출되었고, 유하 감독의 우리 사나운 청소년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하는 항변의 영화를 보았고, 오씨엔에서 방영하는 일본 드라마의 따뜻하고 시원한 여름 이불을 덮고 잤다. 물론 한국 드라마도, 대장금과 다모로 질주할 무렵이었다. 내가 다시금 지사츠를 결심하면, 그런 좋은 드라마들이 출동하겠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원챈스. 말 그대로, 청나라 장군의 이름 같은 원챈스이다. 나카마 유키에는 내게 오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을 실험하지 않는 것처럼, 그와 같은 것을 실험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종이와 필기구가 망가지는 것이 싫다. 서운함은 불만을 낳고, 불만은 안좋은 컨디션을 낳으며, 안좋은 컨디션은 마침내 증오를 낳는다. 그러나 나는 자격이 없었다. 나카마 유키에가 내게서 중요해진 이유는, 그것의 물리학적 공간 때문이다. 나는 나야말로 그라비아의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드라마의 마지막 회는, 어쩌면 모든 시리즈의 마지막처럼, 절체절명이다. 두 소년 소녀는 갈 곳이 없다. 돌판에 새겨진 의고체의 문장은, 마치 태초부터, 소년 소녀의 마음을 희롱하는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은 내가 어떤 식으로든지 경사진 곳에서, 기대 이상의 변화를 겪으면, 자기들이 조인트를 나가고, 거기서부터 일본 영화라는 소설을 받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마음으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니, 돈도 있고, 그것의 서클, 나와 비슷하게 죽을 수 없는 개별적 공산주의 그러나 부자 클럽, 내가 신학대학을 일본에 만들고자 하면 만들고자도 하였던 것이다. 한신대 두번째 학교래도 상관 없다. 오히려, 자기들은 그런 것이 더 좋다 하는 마음이 강렬했다. 그러나 좀체 만날 수 없고, 드라마는 어느새 세상 누구도 아름답다고 진정한 평론을 해주는 사람 없는 일본의 풍경처럼, 인간적인 기대치를 넘어서는 아름다움을 갖게 되었다. 슬픔은 일본말의 공산주의적 성격처럼? 곳곳에 넘쳐 있고, 일본 문학이 말만 많지 결국에는 화질구지라는 새가 되고 있을 때에, 아무튼 너무나 아름다운 출산이 이뤄진 것이다. 비평에서, 이런 것을 두고 작품은 개별적인 것인가? 아니면 국민 문학인가 하는 논쟁이라고 한다. 그것의 전문가는 한국인 박팽년, 이정자, 김출선이고, 일본 사람으로는 유키 마카타니, 사무이 구로스케, 미도리 짱 등이다. 박팽년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픽션인가? 하는 것으로 식자 그룹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정자는 만나는 사람에게 늘 무시무시한 말을 한다. 김출선은 국회에서 자주 보이고, 일본 사람들은 모두 일본에서 한국문학과 중국문학자들이다. 그것은 경력이고, 캠퍼스와 아고라 마라톤 등을 갖고 있다. 국민 문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태평양을 가로지르고, 인도양, 아프리카를 가로지른다. 트릭은 정말, 일본인의 일본 사랑의 국민 문학적 극치이지만, 혼다, 나카마 유키에가 나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피눈물의 주자학적 고백이 마지막에는 드리워져 있다. 세계 문학이란 말이 있다. 그것의 시리즈는 대게 쓰잘데기가 없다. 잔인한 누군가는 프랑스는 철학에서부터 썩어 있다고 한다. 하물며 문학이 살아남겠는가? 고고학적 간섭이 없으면 격이 떨어질 것이며, 간섭이 지나치면, 영혼이 없는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나 될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무인도에 갖힌 소년과 소녀 같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문장인지, 비유와 상징인지, 갑자기 가수가 노래하는 작은 무인도에서,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