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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다만 클래식 이야기. 아름다운 담양에서......

by 마음대로다 2012. 6. 11.

다만 클래식 이야기. 아름다운 담양에서......

 

 

 

 

 

 

 

 

캣런은, 어쩌면 최근의 본 시리즈도, 실질적인 정치적인 알력관계의 개인적인 연구의 산물이기보다는, 클래식의 본질주의와 그것의 주변성에 관한 아주 사적인 탐구의 결과일 수 있다. 그것은 매치에 대한 두려움. 단순 매치가 아니라, 계속해서 불이, 나의 말과 글들이 인화가 되는, 그것의 근원과 배화교, 조로아스터교, 니체의 살아남은 자는 결국 모두 죽는다, 신대루, 그것에 대한...... 십구세기를 지나면서, 음악적인 클래식은 문을 닫는다. 누가 닫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은 미국이나 러시안 작곡가까지 당연 클래식으로 놓는다. 그것의 보이지 않는 균형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모르는 것들은 클래식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이라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백제이다. 백상이기도 하고, 중국의 고통스러운 백백교이기도 하다. 또한 황비홍에서 주인공이 싸웠던 존재이기도 하다. 나의 흼이 알 수 없는 관련을 맺었다. 그것은 아주 순수한 공간으로 보면, 도올 김용옥이 아이들에게 철학 입문을 가르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 형상을 강의하는 순간을 대입하면 금세, 흰 천 위에 붉은 물감이 퍼지는데, 백백교는 이름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왠지 모르게 범죄적이고, 왠지 모르게 순수하게 이해타산적이며, 마침내 황비홍과 같은 존재를 만나 싸우다 죽을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중꿔렌이 광주에서, 도청이나 조선대학교 본관을 보고는, 이건 백백교다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붉은 색을 좋아하고, 얼굴은 약간 검정스럽고, 모든 문장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서 희지 않다. 얼마나 많은 언어학자가 달라붙어야, 중국인들의 언어가 희지 못함을 두고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동북공정이네, 다케시마네 하는 것들이 다, 폴리탄들이 자기도 모르게 하는 말들이다. 그것의 똥구멍을 상상하는 것은 사뭇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개그콘서트 같은, 콘체르토나 콘트로바토레 같은, 생각하는 사람마저 맹하고, 그런 덜된 자리에서 안주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끔 한다. 나꼼수나, 종북세력, 수많은 꼬붕들이 대동하고 있는 정치 세력이, 하는 말이, 태국의 물축제 같은 것이다. 코끼리도 보이고..... 우리는 캣런을 잊지 못한다. 호러 장면을 오브젝티브하게 만들면, 그녀는 너무나 아름답고, 내가 어린 시절에 수상한 음률에 빠져서도 내 편과 남의 편의 부단한 변증법적 관계와 판단에 시름할 때 보았던, 두 영웅, 황비홍과 백백교, 백백교의 수장과 같았다.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그들의 안티테제를 제거하였던가? 다른 것들은 왠지 그래도 될 것처럼 보였으나, 백백교는, 백백교만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그들의 나쁜 행적을 기억하지 못하고, 나의 흼이 보태져서 그러는가? 그러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서도, 나는 중국 사람들은 희지 않으며, 희기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희기라는 것이 무엇인가? 회기. 신당동. 구례. 내게는 묘하게 아름다운 구례구역. 하얗게 만드는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만 다시보기일 뿐이다. 이 말에 브라스와 퍼켜션이 총출동하지 않는다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제도라는 것은 다시보기의 백백교이다. 아니면, 승리가 확정되어 있는 주인공으로서의 황비홍이다. 제도권 밖에 있다는 것은, 계란 껍질 밖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아. 의미로 보면, 연대일 수 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소속감을 느낀다. 소속감이 나쁜 것이 아니다. 정명론. 혹은 당연하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공무원은 나쁘지 않다. 그들은 안도해도 좋다. 오직 식사량과 내 지금의 입맛의 기준을 갖고, 일을 열심히 했는지, 좋은 얼굴로 사람들을 응대했으며, 현장지도에 출동하는 가면라이더처럼 했는지, 돌아보면 되는 것이다. 소속감은 바람 인형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쁘지 않다. 사람은 바람이며, 내게 가깝고, 근접한 몇 안 되는, 전북 고창 출신의 시인의 테제가 그러했다. 자기 아버지는 바람이었다고....... 우리의 문학은 대체, 대체용, 무엇인가? 현재, 무엇이 되고 있는가? 제도와 소속감은 백백교와 같다. 영화가 콜렉션이나 소중한 앨범이 되지 못하고, 소속감과 안정에의 위협이나 지속적으로 선사한다면, 과연 우리의 과도한 철제 문명의 시대에 살아남기나 하겠는가? 살아남고자 했던 것이지만,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가족도 없고, 자동차도 없다. 그것의 비참과, 안타까운 현주소는, 하나님께서 거들어주지 않음에도 원인이 있지만, 그들이 사회적인 현상에서 다를 바 없음에도 원인이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출구와 사람들과 함께감이라는 것이, 마지막의 당사자 자기 손에 의해서 차단이 되는. 백백교의 얼굴은 광기에 넘쳐 있고, 그러나 무술로 단련이 되어 있다. 최고의 무술자 황비홍마저도 죽을 것처럼 당한다. 그러나 종이가 사람을 이길 수 없는 법. 사람들이 종이 위로는 일어서지도 않는 것에 반해서, 물리학적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비백백교, 탈백백교인 셈이다. 여기서 클러치, 동양 사람 중에 어느 누가, 헤겔의 대논리학을 정수하고 있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의 희기가. 그래서 우리에게는, 헤겔이 백백교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 밖에 아무런 출구가 없는 것이다. 제도 너머에서도, 그것의 클리셰 같은 안과 밖, 소속감이 그 어느 것에도 없는, 법화경의 풍경 속에서, 마치 아마추어처럼 클래식을 지리산 가득히 울리는 마음으로다 틀고, 헤겔의 대논리학을, 정신현상학을 종이학 슬픈 꿈을 알게 되었네 하면서 읽고, 다시 보고, 일출을 보고, 일몰을 보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일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러나 일을 못하는 순간이 늘 있고, 일만 단단할 뿐일 때가 많지 않은가? 그것은 어째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