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에서. 순자에 관한 무한한 이야기 중에 하나, 나로서는......
나주에 광주전남 면허시험장이 있다는 것은 삼척 동자도 아는 것이다. 나도 이종 소형을 집에서 가까운 학원에서 취득하지 않았다면, 전남 면허시험장을 한 다섯 번 가량 왔을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경험 있는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남격에서도 그것을 비춰주었다. 연습을 여러 번 하고 가도, 막상 시험 볼 때는 그 놈의 원챈스의 물리학 때문에, 단번에 패스가 참으로 요원한 것이다. 도시가 나를 바쁘게 하지 않는 경우, 오직 오토바이 이종 소형을 따기 위해서 나주에 오는 것인데, 때로는 이미 이종 소형급 오토바이를 저 멀리에다 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정말, 파헬벨의 캐논이다.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제목의 미학이, 떠나는 버스를 수 차례 강하게 철면을 두들기면서 올라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유는 없다. 다만, 우리는, 뭔가를 따라 잡은 시공간에서는 남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을 뿐이다. 시골에서 공부하는 한량이 되어, 나의 전도에 의해서, 이종 소형까지 시험을 치르고, 떨어지고, 버스를 뒤늦게 올라타는 드라마틱을 발휘한 뒤에, 아직도 해가 중천인데 우주와 같은 적막과 깨끗함의 집에 오면 사람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떨어지는 것은 낙엽이 있다. 그것의 풍광은, 학교, 대츠오, 학교, 이름이 꽂히는 바의 그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원동기 분류의 오토바이를 타고 가서, 이종 소형의 갑자기 무거운 것을 이끌고 코너를 돌기가 하늘에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렵기 때문이다. 이 간격은, 간극은, 대체, 누가, 무엇이, 어느 누구의 관료 정치란 말인가? 나는 천재인가도 싶다. 그것을 내다보았다. 학원에서 연습하고, 그곳에서 시험을 보는 길을 택했다. 단번에 합격했고, 파헬벨의 캐논을 듣지 않았다. 대신, 인터넷 사람들이 알려주었다. 창원인가 하는 곳이었는데, 부산 사람들도 가서 시험을 보던가 했다. 외국인도 있었고, 몇 명 합격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떨어지고, 오락실에서 오토바이 오락도 하고, 친구와 그 모습들을 사진 찍고, 인터넷에 올렸고, 그것이 꼭 작은 독립 영화 같았다. 남격에서도 모습은 같았다. 한 번에 합격한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교수님 같은 한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두번째인가 세번째에 합격, 다른 나머지는 패스를 못하고, 작은 스쿠터를 타고 아름다운 호수가의 도로를 도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호들갑이 아니다. 사회성이 가장 높은 곳에서도, 비패스자는 계급이 다른 것처럼 쓸개맛을 보았는데, 홀로 된다는 것이 두렵다는 어느 가수의 노래 소리처럼 된 사람이, 겨우 친구 한 명과 출동해서 패배하고 돌아오는 길이란, 불국사의 계단 길과 같지 않겠는가? 석가탑은 무엇인가? 자기가 되고 싶은 장군이나, 학자가 아닌가? 다보탑은 무엇인가?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은 여인이 아닌가? 자기에게도 실패하고, 사랑에도 실패해서, 자발적으로 계단에 떠밀려진다. 우리가 경주 불국사에서 그와 같은 같은 극의 자석 운동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심미안이 없는 것이다.
순자는 미스테리한 것이다. 그는 논어에서 말하는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보다 날카롭게 가한다. 논어에서는 나주가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선생에 대한 이해가 깊다. 안회라는 학생에 대한 사랑이, 선생의 인자하심의 도덕을 거울 비춰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그렇게 날카롭게 하다가, 마침내, 선생도 하찮다는, 그것을 가장 먼저의 문장들에 드러내면서 시작한다. 물론, 읽다가 보면, 치유되고, 혼합되며, 사랑은 다시금 회복한다. 그러나 그 맨 처음의 순자는, 찰흙 같은 도시 국가의 풍경은 사뭇 아찔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순자는 선생이 아닌가?..............
영산포에는 생태 공원이 있다. 그것은 지금의 모든 한겨레 부띠끄들을 멸시하는, 최소한도로의 영화가 있다. 도리어 조선 같은. 우리 말의 경험적 시공간.......
순자의 미스테리는 더더욱 진행형이다. 그것은 나주라는 지명의 심오함과도 같다. 우리는 독일 철학을, 마치, 선민사상처럼 가정 교사와 짝해서, 공부해서, 외국어 고등학교를 다니고, 서울대나 연고대, 전대 철학과를 나오고, 독일로 유학을 가서, 하이델이나 튀빙엔, 스위스의 바젤 같은 곳에서 공부를 해서, 그곳에서 공부하던지, 아니면, 공부를 못하게 하는 태공조에 쫓겨서 귀국해서 대학 강사부터 시작하는데, 전남 나주를 지나면서 마음이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있는지, 우리 자신의 참나가, 조사가 가능하다면 조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들은 말이 없다. 그 쓸쓸한, 실제로는 대단히 영화로운 심리극. 사이코. 순자에는 대유가 나오고 소유가 나온다. 그것은 순자를 고대 명유의 시대에서 대미를 장식한 사람이라고, 학자라고, 하는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시황제 단편으로 해석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거대한 퀘스천 마크가 하늘에 생기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은 개그맨의 억양이다, 우리 자신을, 나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시절의 젊은 나는, 대유가 있었고, 소유가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대유나 소유나 같으나, 그것으로 수신에서부터 치국평천하까지의 선명한 로드라이너 천구백 같은 것을 갖는 사람은 드물다. 대충 도서관 수위나 되어서, 영혼의 사진이, 낯설게 된 사람을 하대하는 것을 단테스 피크로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대유나 소유나, 키는 같다. 키가 크다고 해서 대유이고, 작다고 소유이면, 그것이 무슨 사상이 되겠는가? 연애 프로그램이나 되지 않겠는가? 대유인데, 키도 큰 남자를 사랑했던 소유, 소유진, 안회, 혹은 슬픈 나주....... 그러나 그렇지 않고, 작아도 힘이 세고, 말도 잘 타고, 두껍고 무거운 책도 거뜬히 읽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성리학은, 그것의 계란 껍질 같은 것에 무수한 귀뚜라미 벌레 들이 있는 것을 볼 뿐이며, 단정하지 않고, 운명 짓지 않는 것이다. 어제 티비에서 보았는데, 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웠고, 너무 개체수가 많아서 시가가 떨어질 것 같으면, 개구리들에게 먹이 준다고 하는 부분에서는 통쾌하였다. 옆에 있던 작은 소유도, 리포터, 대단히 남자가 영민하다고 했다. 시황제 이전에는 문건도 없고, 유학자도 없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공자를 인용하고, 노자도 인용한다. 시경을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인용한다. 그것은, 인류 정신사에 무슨 영향을 미친 것일까? 그것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외롭다는 것이다. 그것의 과장은, 주관은, 나주는 주변을 피폐하게 만든다. 학생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으며, 사랑하는 아내도 문건에 보면 두 명이나 있고, 여행도 다니고, 그리고 유학자도 대유건 소유건 우리가 예기를 그들의 공동 저작으로 여기는 것처럼, 여기가 아주 대단한 것인데, 문장력이 시황제와 별 차이가 없는 이들이 있고, 그렇게 안정적이고 차분한 달팽이들이 숨을 쉬는 정원이 있었는데, 자기 혼자 사막의 낙타인 것처럼.......
시황제의 저작은, 거의 모든 것이 나주이다. 순자가 광주에 진입하려는 유일한 에너지였다고 말하면, 맹자와 논어는 슬픈 것이다. 그러나 점점 순자는 나주가 되고, 열자에서는 그 좋은 시력을 잃더니, 한 없는 한비자에 이르러서는 기억상실을 했다가 되살아난 핑계의 클리쉐 같은 드라마를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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