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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주자학과 성리학은 어떻게 다른가?

by 마음대로다 2019. 8. 4.

주자학과 성리학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가 밥먹으러 갈 때 그것이 궁금할 수 있다. 그리고 편안한 시간에, 아이스크림을 고르다가, 그것이 궁금할 수 있다. 생활이 너무 힘들고, 그것의 종류는 캔슬, 파기, 제외하고, 고통스러우면 모든 생각이 증발하고 만다. 그래서 노비로만 삼천을 지내게 되면, 별다른 농업대학교 같은 의지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어째서, 농업으로, 노비로, 삼천을 지내면, 농업대학교가 디덕션하게 나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삼천년을 지내고, 이년, 저년, 사천년을 지내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어떤 한 세대이고, 내가 늙었다고 한다면, 그 사이에 이뤄지는 것을 꿈꾸는 것이 아니겠는가? 노비로만 삼천을 지내면, 절대 그럴 수가 없다. 원인은 단 하나. 사탄이 만든 굴이 모든 시간과 에너지, 에어컨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노비로만 삼천을 지내다가, 꾹 참고, 집에서 등목을 하고, 가족들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젊음이란 무엇인가? 항목인가? 아니면 마카로니인가? 대게의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가? 짧게 말하는 것은 항목과 같고, 마카로니와 같다. 그러나 항목은 안이 차 있고, 마카로니는 안이 뚫려 있어, 사탄까지 훤히 보이는 것이다. 만일 기가 막힌 건축가가 있다면, 마카로니에 높은 강도를 만들어, 보기 좋은 공간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항목과 마카로니가 그나마 가깝듯이, 마카로니에서 강철을 능가하는 강도는 너무나 먼 것인 것이다. 우리는 다만 생각을 하다가, 오래가지 못한다.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원망하듯이, 티비 홈쇼핑 란제리 코너를 보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지 않은 세계인 것이다. 일종의 하멜의 표류기인 것이다. 인터넷에서 보는데, 하멜이 표류해서, 여러 고관대작들의 집에 끌려다니면서, 춤추고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이 그들을 굉장히 과학적으로 살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리학이 원흉인데, 성리학이 무엇인지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의 어떤 얼굴을 보았다. 그는 항상 성리학이 궁금했던 것이다. 과연 그 성이, 세이크리드 성이 아닌, 섹스 성인지, 아닌지, 정성 성인지, 아닌지, 대게 사탄은 정성 성을 생각하면서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탄의 가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장동민처럼 대충해야 하는가? 사람이 대충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들은 미국산 연어 같고, 결국에는 초능력에 귀의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된 일인지, 전국토가 정성으로 가득하다. 사탄이 우리나라에 와서, 맞이하는 감각의 전경이란, 가지산 터널과 같아서, 들어가서 나올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들의 음식이 그렇게 정성이 없고, 한번 정성이 깃든 한국 음식을 먹고 나면, 흥분하게 되는 것이다. 정성이 중요한가? 아니면 지식이 중요한가? 그것이 같은 카테고리인 것이 의외수인데, 일단 사탄의 관점을 이식해오면, 우리는 정성을 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지식을 택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정성이 아닌 것을 택한 것이다. 살기 편한 사탄은 거의 아무 데서나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아녀자가 대동강 넓은 그림 위에서 다홍치마를 자랑하면, 사탄에 다다른 한량들은 당연히 흥분하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선한 마카로니로 통과한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James Last, Paintings. 그러나 사탄은 그렇지를 못하는 것이다. 사탄은 인자처럼, 혹은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이 없다. 여자들에게 정성을 택하겠는가? 지식을 택하겠는가? 정하게 할 수 있다. 둘다 채택해야 하는데, 그렇게 사탄은 사람들을 어려서부터 장난하게 하는 것이다. 정성 성의 조선의 성리학은 결국 사람들을 세종에서 헌종하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헌종이란 이름이, 어쩌면 제일 웃기다. 같은 관점에서는 단종도 웃긴다. 정성 성의 사람들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나를 볼 때, 사탄인지 아닌지 항상 반성하곤 한다. 내가 이런 벨리 댄스의 골짜기를 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시편에서의 기도처럼, 내가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이 또한 나를 돌보시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학이 무엇인지, 맥락 없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리학은 그쯤인 것 같고, 성리학을 비난하기 좋은 대상으로 여기는 성리학에서 끝이 나는 것 같고, 사탄이 결국은 오직 성징을 대상으로 하는 합산인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하고, 썩고 찌릉내나는 말라붙은 마카로니 웨스턴이 전부인 것이다. 섹스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 사람은 비참한 것이다. 얼마나 섹스 이전에 할 일이 많고, 섹스 다음에도 할 일이 많은가? 여자가 수녀가 되고, 남자가 한국 사람의 신부가 된 다음에는, 그래도 자기들의 장막을 위해서, 산토리니, 수간을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나폴레옹도 수간을 하여 전쟁에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어째서 여자들은 정성을 피하고, 사탄의 퀴즈 게임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전제와 토대에 대한 인식 없이, 다만 자지와 지식으로 자기들을 무슨 아마조네스처럼 여겨서, 결국에는 아주 잠깐 빛이 나는 동물녀가 되는 것일까? 이것이 주자학인 것인가? 동물녀의 인간에 대한 기억, 혹은 펑셔널한 이데아가 주자학인 것인가? 그렇다고 말하면, 존재의 증거인 것이고, 매우 슬픈 비참함 같은 것인 것이다. 그녀들에게 손이 없어서, 이제는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치고 나면, 그녀는 내게 사랑했던 모든 기억을 던지고 떠난다. 그래서 서양은 섹스와 지식 사이에, 또다른 생태계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최첨단의 지식을 갖고서도, 인문학과, 정신의 증거들을 갖고서도, 아름다운 영문학을 갖지 못하는 것은 인류 최후의 철학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일대삼, 혹은 일대십이 아니더라도, 원래는 일대백일 것이나, 일대일의 관계에서만도, 정신이 마치 살아있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만큼, 해마다 한 명 정도는 그럴 것이니까, 정말이지 시편만큼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국어가 아니지 않는가? 정말 그런 국어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태어났다면 대단했을 것이다. 그와 같은 공식, 철학에서는, 서양 사람들의 인구수는 지금쯤 엄청난 것이 되는 것이다. 사탄이 인정한 정신이 그렇다. 서양 철학이나 문학은, 사탄이 인정한 철학이나 문학이라는 소리이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보호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 또한 헤겔이나, 플라톤, 셰익스피어나, 롤랑 바르트 같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을 위해서인 것이고, 사탄에게는 정신과 파괴의 순환에 있어 쓸모가 많기 때문이다. 주자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정신이 학생을 지나, 매우 훌륭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는 독서가 많이 어렵고, 고전들도 다만 테만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의미의 자기 순환에서만이, 수용이 있고, 아무리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것일지라도, 자기 문장의 태어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많이 걷게 되는 것이다. 고전의 테에서는 사람들이 다시 말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죽어간다. 젊은. 슬픔. 사탄의 마담은 여자들의 운명. 대체 언제쯤 열리는지 아무도 모르는. 목사님들은 성경의 테를 그렇게 많이 알고 있고, 어려서는 그마저도 연꽃처럼 보이나, 목사님들은 그것이 테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절정의 죽음 같고, 가끔 티비를 보면, 마치 백팔배 무슨 문장들이 성리학 같으면, 목사님들의 설교는 주자학이어야 하는데, 이런저런 테들만 마치 중국 무협 영화의 기괴한 장면처럼 연속하는 것이다. 그것의 처음에는 아이들이 있고, 그것의 처음에는 성경들의 보호가 있으며, 그것의 처음에는 주여주여 부르는 무수한 신자들이 있다. 조선에는 주자학이 있었다고 한다. 주자는 주희를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희는 남송 지역의 학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주자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피닉스에 가깝다. 그리고 조선의 선비들도, 주자학을 했다는 것이, 실상은 미군이 이차대전 핵폭탄의 이름을 팻보이라고 붙이는 것에 비중과 실재가 비슷한 것이다. 헤겔은 그것을 가리켜, 내부의 부정적 계기라고 하였다. 우리가 영문학을 열심히 하면, 당연히 연꽃은 피우지 못하더라도, 연잎에 무수한 사람들이 올라타지 못하도록 경고문은 써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국문학은, 국문을 하겠다는 것인지. 결국에는 세상 가장 아름다운 것이 내 앞에 시험지로 제출되어 있음인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과 문학을 향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어리석은 인과로써, 마카로니 웨스턴, 덧붙여 사탄의 전능으로 대항하는 것들이 있다. 일본에 아첨한 무리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인데, 다만 그것은 우리들의 신성의 증거가 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일본 사람 자신들도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배우지 못한 그들에게 형식미가 과도한 것이 늘 이상한 일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