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빨리 자야하는데 글을 쓴다. 그것은 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사정기관이라는 것이 있다. 사정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과연 육체일까? 아니면 정신일까? 내가 여자의 글을 재밌게 읽었던 적이 언제인가 싶다. 가혹한 집단과, 단체, 집체 속의 것들의 말들을 들은 적이 언제인가 싶다. 내게는 유효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일종의 채널권처럼, 나는 안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본다. 왜냐. 안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너무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하다고 해도, 실제에서는 파장일 것인데, 선하지 않은 것을 자랑하는 것을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정생존자가 내게서 유효를 얻은 것은, 어느 정도는 재밌게 보다가, 내가 안보는 채널이 침투를 한 것인 것이다. 보통의 못생인 여자들은, 잘생긴 여자들에 대해서 환상이 많은데, 그것은 그들이 매우 거만할 것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환상은 열에 하나 정도는 들어맞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존재라는 것은 그렇다. 바늘구멍이라는 것이다. 바늘도 존재요, 구멍도 존재이며, 낙타도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여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의 말을 듣는다. 바늘의 말을 듣고, 구멍의 말을 들으며, 실의 말을 듣는 것이다. 바늘이 가는 곳에, 실이 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말에서 사탄의 자기 느낌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구멍 앞에서, 통과하지 못한 낙타의 얼굴을 하고, 눈썹을 하고, 와썹,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그것인 것이다. 한 번, 그와 같은 존재의 길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했던 기자, 다른 정치인들은 왜이리 거지같은지, 마치 그들 세계의 수장이 된 것처럼 색을 내뿜고 있던 여자가, 그나마 바른 포지션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과 계열의 사람이 존재의 길에서 흔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남자와 사귀고, 서울 바닥을 좁다싶게 만나고, 이야기하고, 떠들고, 술마시고, 노래하고, 비젼을 어떻게 하고, 책도 내고, 함께 내고, 토론회도 하고, 김영하도 초청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디안 장막 같은 추켜세움도 하고, 그래봤겠는가? 그것은 연속한다. 분명, 불쌍한 치매 환자처럼 가방을 놓고 오지는 않는 것이다. 가방은 여성성이다. 그렇게 비싼 것이 없고, 공허한 것이 없다. 그것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몸에 붙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실한다. 그들은 대게 분실물 센터가 된다. 그리고 통닭을 사기도 하는데, 너무 만남이 애틋했는지, 지하철에서조차 분실하는 것이다. 너무 아첨을 했을 수도 있고, 너무 비정상적인 표현을 남발한 것일 수도 있다. 집이 가까운 줄 알고, 통닭을 샀는데, 인터넷에서 그렇게 안타깝다 하였다, 생각보다 이번 집이 멀었고, 모든 말들이 도산하고 나니, 집 근처에서 통닭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 것이다. 문과생들이 힘든 것은, 이과생들이 환경부 장관 운명 같아서일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이과적이다. 문과생은 집 문 밖만 나가도, 사라지는 것이다. 문과생도 본질적 청강생을 제외하면, 없다시피 한다. 못생긴 여자가 갖는, 잘생긴 여자가 매우 오만할 것이라는 편견을, 그대로 드러낸 장면을, 어떻게든 마무리짓고, 해석한다면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모든 말은 오므라든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손가락을 주고, 어린아이가 그 주먹으로 손가락을 쥐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슬퍼하는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어린아이는 나의 오므라든 모습이다. 영혼이 이 정도까지 영 그러니까 나이 어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해석 능력, 기본적인 이과적인 능력이 북한처럼 영원한 객체가 되지 않는다면, 그런 것이 함께 사는 서울에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때,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어서, 누군가의 손가락을 거대하게 잡아보는 것이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경험이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자주 변해서, 나이가 들어서, 화두 같은, 좀더 철학적 사변이 있는 글을 쓸 줄 알았는데, 힘만 빠지고, 할머니가 되어서, 그렇게 도심 거리로 트렌치 코트를 입고, 카페로, 햄버거 가게로 출석하였던 최인훈만 봐도, 인간의 생각과 글이, 더불어 함께 있는 주자로서의 육체가 오므라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중국이고, 그것이 사탄에게 아무런 저항값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것만 알고는, 인간 악보의 기계적인 끝맺음을 당했던 것일 것이다. 그들은 그렇다. 다른 사람이 힘이 있고, 좀더 본질적인 것이면, 페이드 아웃이 되는 것이다. 이공계는 허상과 같다. 목발이 아니면, 아무데도 갈 수가 없다. 머리가 늘 에어컨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차단되면, 생각 자체가 작동되지 않는다. 최인훈은 군대 시절에, 사병으로서는 너무 힘들었고, 그래서 장교 시험을 보았고, 세탁 장교 일을 했다고 했었다.
스포츠는 정말이지 원망 중에 원망이다. 스포츠가 필력으로 한강 다리 연결되는 성은, 오직 하나 남성일 뿐이다. 공부가 한창일 때, 운동을 조금만 해도, 피곤이 도지고, 공부를 못한다. 매우 왕성한 남자들이, 운동의 쾌락도 좋아하고, 공부도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는데, 스포츠의 동작들이 그렇게 생각의 진행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공이 추상적인 공간을 나아가고, 나의 팔과 다리가 더더욱 추상적인 공간을 나아갈 때, 그런 추상적인 것들이 결과적으로는 구상적인 일들이 되는 것이다. 순수추상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이 감각의 외부에 있다면, 당연한 것이고, 감각의 주체 내부에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가장 먼저 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외화될 수 밖에 없고, 내부적인 추상성이 어쩌면 가장 먼저 내면화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부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서부터, 내면이 풍부한 것을 능력으로서 인지하는 것이다. 능력은 무능력과 연결되어 있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능력으로서 켜켜이 쌓이다가, 마침내는 사회화에도 성공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공허하고, 그림자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관계인 것인가 할 수 있는데, 무능력과 함께 하는 감각적 주체를 생각하다 보면, 그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인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스포츠를 하면, 그렇게 지식이 배가가 된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온 국민을 상대하고 있어서, 불화는 되는 것이다. 불화는 불화를 조성하지만, 다만 개인보다 낫다는 차원이 아니라, 개인과 함께 있기 때문인데, 아내가 사탄의 여와라고 한다면, 중국 남자는 거기에서 멈춰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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