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어원에 관하여
미국이 한국의 편에 서는 것은, 딱히 한국어를 많이 알아서가 아니다. 사람이 말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반면에 간접적인 관계를 맺다는 것은, 그것을 아는 것은, 때로는 훌륭하고, 때로는 불쌍한 도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이고, 미국인에게는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되는 것은, 직접적으로도 문제가 안되고, 일본인들처럼, 성경을 본 적도 없고, 케이에프씨말고는, 크리스마스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는 더더욱 공포 영화가 횡횡하는 공산자유주의국가에서는 문제가 안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표현의 자유요, 사탄에게는 전도의 방책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웃관계에서는 서로가 윈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단 하나의 옳은 것에 올인하게 되는 것은, 단 하나의 경우 밖에 없는 것이다. 온 몸을 지지고, 얼굴을 지지고, 울부짖기 시작하니까, 처음에는 영화에 빠져 그들이 분업하여 전쟁하는 줄 알았지만, 반복되고, 잠결에 웰던한 부분을 갖고, 누군가 맛있게 저녁으로 먹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가상인지, 진실인지, 혹은 거짓인지 모르도록 있다가, 우리가 영단어를 그렇게 암기하려고 해도, 빠져나가다가, 마침내 빠지지 않는 오브스터클 같은 단어와 경우를 보자면, 드디어 이것은 아니지 않는가, 더 이상 영단어가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서의 판단이 생기는 것이다. 더욱이 불쌍하기도 하는 것이다. 원래 지저스는, 당사자만 피하면, 세상이 고해인 것이다. 그것은 수학이고, 그것은 김원봉이다. 그것은 무장독립투쟁이고, 그것은 김좌진이다. 그러니까 지저스도 별 문제가 아니 될 뿐 아니라, 마치 보혈처럼, 육즙을 생각하면, 지저스는 우리가 생명을 이어가는 모두스 비벤디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와 같은 생각은 깨지게 되어 있다. 생각 자체가, 우리가 평생 만나지 못하는 고전 바깥의, 무능력자의 처세술과, 그림자, 그것들의 바다 같기 때문이다. 바다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바다는 넘실거릴 뿐이다. 미군들은 정신을 차리게 되어 있다. 그나마 주한미군들은 예수라는 발음과, 조합과, 단어들을 알기 때문이다. 몰라도, 그들끼리의 전쟁 중에, 먼저 든 인두로써 상대를 지질 때, 지저스 크라이스트, 지저스 크라이스트 하는 것은, 분명 한국말과 영어의 중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한미군에 있지 않고, 그들끼리의 펜타곤에 있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반드시 죽는 것이다. 아파서 죽고, 치료를 받지 못해서 죽고, 먹을 것이 따로 없어서 죽는 것이다. 처음에는 먹지 않았으나, 늘 언제나 적응의 천재들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자취방이나, 기숙사, 알 수 없는 참호 같은 곳으로 들어가서는, 커피 물을 끓이고, 인간적인 음식을 먹고, 티비를 보고, 꼬마 철학자가 되어서, 세종대왕이 가르치신 한글을 배우는 것이다. 어째서 그들의 지저스 크라이스트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만 있는 것일까? 어째서 한국 사람들의 예수님은, 도리어 거꾸로 가는 시간처럼, 들판에서 제자들과 보리 이삭을 함께 먹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일까? 천년의 기독교 신학이 있었어도, 후발 오백년 가량의 영문학이 있었어도, 보편도 하나, 특수도 하나, 더러운 보편과, 특이점만 많은 특수에서는, 그리고 그것들의 결합에서는, 우리는 좀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밀이기도 하다. 이데아가 어째서 관계이겠는가? 플라톤이 어째서 서브스탄스이겠는가? 그것들이 천년을 배우고, 생각하고, 익혀도, 우리들이 짐작하여, 상상하고, 인문적으로 진행하는 곳에는 절대 다다르지 못하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이 같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 성기 뿐이다. 성기만 끊임없이 노출되고, 방송과 뉴스에서 아주 캐릭터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완비되어 있고, 그것이 동양에서도 부지런히 노력 중이다. 우리는 생각이 짧고, 그것들의 자지에 너무 후하거나, 미약하거나, 지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뉴스의 연속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문학이 보편적인가? 아니면 변신이 보편적인가? 그와 같은 질문은 이어령도, 박학기도, 방태준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들은 체질이 무임 승차와 같고, 하는 짓은 임채무와 같다. 문학이 보편적이 된 것은 대단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그러니까 인간 정신의 승리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사물들을 갖고, 그만큼 변하는 것을 최고로 여긴다. 사탄이 어려운 것은, 사탄도, 예수님처럼, 패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탄이 좋아하는 인물들이 있고, 분명 티비에서도 예수님의 편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눈에 띠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분명한 인과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인과를 서양의 정신이라고 여겼던 것이 엇그제와 같은데, 그들은 금세 그들의 장기와 자랑을 잃어버린지 오래인 것이다. 꽉찬 성기와 사탄의 패션이면, 일년이 후딱 지나간다.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메타피직스라고 불렀다. 문학은 메타피직스인가? 아닌가? 위대한 문학가가 사랑에 빠져, 사랑하는 여자가 펠라치오를 하고 있으면, 정신을 잃을 것인데, 그래도 자기 기분에 취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면서, 눈을 떠서 여자를 보고자 하면, 여자도 있는 것이지만, 사탄도 있는 법인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언젠가 내가 사랑하는 여배우가, 벗고 나오겠지 하는 기대 심리가 있어서가 아닌가? 그것으로 사람들은 분유를 사고, 어려운 육체의 삶을 분유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도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적어도 영화관에서만큼은 자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순진한 인간의 아름다움과 결합되어 있는 사탄이, 자기가 보기에도 가장 화양연화와 같은 것이다. 끊임없이 속삭이고, 사람들을 자기들의 최면거리로 여긴다. 두려움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자지보다 똑똑하지 않다. 그것을 위해 특별한 훈련을 하지 않는다. 사탄은 밤낮없이 훈련하고, 매일같이 지저스 크라이스트 하며, 한국으로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하면서 유학을 보내는데 말이다. 위대한 성리학으로써, 세상을 점령하는 꿈을 꾸는데 말이다.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더러운 보편에도, 특이점만 많은 특수에도 있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관에는 영화 배우가 있듯이, 이상하게 우리들의 배우들이, 문약한 작가들과, 사탄의 메타피직스에 익숙한 생산자들 사이에서, 사탄의 그림자와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배우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 어린 학생들, 젊은 것들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두려움이란, 다만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이다.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사탄의 보편적 국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에 대한 걱정인 것이다. 화투에서 초짜가 전체 판을 쓸기도 하는 것은, 사탄과 대결하는 세력이 화투를 치는 곳마다 분위기를 세우고자 하는 매우 지난한 작업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많이 경험했지 않은가? 그때마다 기분이 이상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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