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민중문화이야기

기아 케이 세븐과 스즈키 카타나

by 마음대로다 2019. 6. 12.

기아 케이 세븐과 스즈키 카타나 





우리는 이와 같은 글을 상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천박할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그것의 활동과, 구역, 그리고 반경 같은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케이 세븐이면 케이 세븐, 카타나면 카타나 그렇게 말하고, 듣고, 쓰고, 읽고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도이며, 그것이 바른 삶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위와 같이 이름을 짓고, 산문을 또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다. 산문이 아니고, 시이다. 시는 경계가 없고, 엣지가 없거나 날카로우며, 타진 데가 있거나, 보고자 하면 다른 흐름에 함께 하여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산문은, 아무리 아무렇게나 쓰려고 해도, 그나마 인식의 평상함을 벗어나지 않는다. 시는 활에서 벗어날 수 있고, 먼저의 시간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 우리가 고개를 넘는다 할 때, 그것은 한 두 세 시간이 된다. 한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고, 두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다만 고개인 것 같고, 넘는 것 같은 기분이면, 아득히 먼 고개가 눈에 띄다가, 한정 없이 걸은 다음에, 그것을 살짝 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그것을 잃어버렸다. 우리 때는 그런 것이 있었다. 그레고리안 찬트 같은 것은, 어머니와 걷다 보면, 생기는 것이었다. 우리가 무협 영화를 보았던 것은, 어린아이가 분명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의 인간들은 급하게 자동차를 탈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많다고 해서, 어린아이의 그레고리안 찬트에 포섭이 되는 것이 아니다. 천녀유혼에서 남자 주인공만 빼고 거짐 다 무공이 있었다. 그것은 차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의 절대적인 차이는 이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차를 많이 타고, 다른 교통 수단을 익힘에 있어서, 보다 빠르게 자동차를 운전할 줄 알며, 오토바이의 왕국, 혹은 천국, 일본에서 네이키드 바이크를 하나 탈 줄 안다는 것은, 분명 그와 같은 심결이 대체되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절대적인 것이 없다고 해도, 상대적인 것으로 어떻게든 그와 같은 심결의 절대성을 채워야 하는 것이다. 기아 케이 세븐이 갈수록 잘 생겨졌다. 중간의 얼굴을 우리가 기억하는데, 그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좋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 기자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모든 시민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저렴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엄청 고가의 승용차도 아니었다. 그것을 사는 사람은 인도적인 데가 있었고, 박력이 남다른 데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박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외국어를 잘 할 줄 모르면서도, 외국과의 부단한 관계를 이어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박력이 있어서가 아닌가? 그리고 북한이 한국과 거의 단절되어도, 아무런 맥락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어도, 우리가 그들을 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마땅한 합리성 때문이 아니라, 민족적 존재의 근본으로서의 박력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미시령 터널을 지나, 돌아보면, 산세가 그렇게 박력이 있다. 그와 같은 음악적 템포는 장관을 이루고 있고, 거기서부터는 강원도 사람들은 감자 아니면 오징어 그리고 새우 튀김 같은 것만 먹을 것 같은 것이다. 그렇게 박력이 넘치는 산악을 보고서, 전라도 사람들처럼 쌀과 고깃국 그리고 김치 등을 먹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라도 사람들도 박력이 있는 것처럼, 그들도 그것의 연관성, 혹은 동일성 때문에, 쌀과 국, 그리고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박력으로 전달된다고 하여서, 고랭지라고 하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라는 말로서의 대관령 목장인 것이다. 얼마나 산세가 사람들을 갈라놓을 것 같으면, 이름을 너와집이라고 하였겠는가? 그것이 지리 시험 문제로 나오면, 그렇게 맞히면서도, 신기하고, 걱정스럽고, 나의 무의식적 교육이 그들과 달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사람은 두려움을 많이 느낀다. 그러나 전라도 사람들은 잔잔한 대나무 숲과 강을 보면서, 무등산의 단정한 서석대 입석대를 보면서, 걱정 가득한 미래로 향하였던 것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세상에 그런 원리가 있다면, 걱정에 질식될 것 같았다. 내가 강원도에서 군대 생활을 했던 것은, 강원도 사람들이 강원도에서 지내는 것이, 누군가의 영화 제목처럼, 강원도의 힘에 준하는 것이 아니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 아니었을까? 내게 생각이 있는 것인가? 내가 누군가의 말마따나, 생각이 있고, 기준이 있으며, 그 기준에 따라 생각하는 성격인 것인가? 기아 자동차 사람들이 이번 케이 세븐 디자인을 보고 너무나 좋아한다고 한다.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흐르는 강물처럼, 자동차를 생산하여 실어나르는 동안, 그만 자동차 디자인에 대한 안목이 생긴 것이다. 다만 몸을 던져 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하고, 생각하고, 생각을 나누고, 탁구도 치고, 당구도 치고, 커피도 마시지 않겠는가? 이번 케이 세븐이 크기도 크고, 실험적인 페이스에서부터 벗어난 것 같은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오래갈 것 같고, 그것이 또한 얼마나 오래고, 먼지 쓰며, 수많은 도로 위에서 사람들과 온 몸으로 말하겠는가 싶은 것이다. 안정적인 시학을 마련한 것 같고, 노동자들은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말할 수도 없고, 이제는, 내가 또한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기쁨이 된다. 기쁨은 갑자기 쏟아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쁨은 잔잔하게 누적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처음의 케이 세븐이 다만 그런 생각을 일절 거부하는 장난스러움이 있었다. 두번째의 케이 세븐이 독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들도 그것을 알아보았고, 일하면서 다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 뿐이었다. 이번 케이세븐이 노동자들도 처음 삼십퍼센트 가격을 입금하고, 달달 약 사십만원 가량으로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것이다. 그것이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스즈키 카타나는 어떻겠는가? 생각에 이와 같은 함수가 있는 것이면, 스즈키 카타나는 어떻겠는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스즈키 카타나는 어떻겠는가? 



스즈키 카타나는 어떻겠는가? 

카타나 스즈키는 어떻겠는가?

어떻겠는가? 스즈키는 카타나

카타나는 어떻겠는가? 스즈키









그렇다. 앞으로의 일본은 스즈키 카타나가 이끌어갈 것이다......

혼다. 야마하. 가와사키 다 필요 없다.


내 말이 시마 과장처럼 들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