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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일본 드라마에는 금기가 있다.

by 마음대로다 2019. 6. 1.

일본 드라마에는 금기가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하다는 것이다. 그것이다. 그것은 굉장하고, 스고이, 어쩌면 우리나라가 우리의 식민지를 당했다는 것을 굉장히 창피해 하는 것처럼, 만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보혈의 피가 필요했다는 것처럼, 그러니까 모아 놓고 보면, 그와 같이 발성이 되는, 그들은 다만 정치적 입장으로서의 극우가 있을 뿐이지, 아무런 스토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무식하며, 권력적이고, 트랜스젠덴탈한 아름다움의 뻔뻔한 주인공이 있으면, 귀가 쫑긋하고, 그것의 불가피성을, 박쥐의 성으로, 그들의 것을 자기들의 입장들로 탈바꿈을 하려는 여하한 준비를 하고 있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그것까지 우리는 감지할 수가 있다. 그것을 우리가 제국주의적 미학이라고 분류할 수 있었다면, 드라마 이몽이 보이는 것은 매우 트랜스젠더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드라마적 비행, 그러니까 폴스 애덜러슨스 같은 것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우리의 멈춰 있는 명경지수는 반드시 물고기들도 깃들이지 못하는 가혹함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든지, 믹싱하고, 혼합되어 있고, 그것이 기생충이 손에 손잡고 내려가는 길일지언정, 우리 옛날 사이다와 같은 타산지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정말이지 현상이요, 형이상학인 것 같다. 대학에서 가르치지 않으니까 말이다. 현상학 강의라고 아무개 교수, 그렇게 대학교 철학과에서, 개강을 했다 하면,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가, 일부러 학생 한 명은, 사람들이 많아도, 자리가 넉넉한데도 불구하고, 창틀에 앉았다가 정원으로 떨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현상금을 걸고, 그것의 사진을 갖고, 칠판에 붙이고, 학생들에게 화산고 영화를 보여준 다음에, 신간회 해산을 시키는 것이다. 낙엽이 지고, 프랑스 샹송을 듣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여자들은 예수님을 낳으려고 하나, 하나 같이 이상한 사람들 뿐인 것이다. 나이가 있으면, 나이가 있어서 이상하고, 나이가 없으면, 나이가 없어서 불짬뽕 같고, 군사 권력이 있으면 일본 여자들은 부르르 떨었던 것이다. 또다시 조선을 침략하고, 만주로 침략하고, 미국과 전쟁하고, 핵폭탄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죽음으로써, 이상한 육체의 문이 되어서, 한국의 문학은 전부 일본군 죽음의 댓가로 일본의 것이 될 것인가? 그럴 운명이었던 것인가? 한국의 문학은 절묘해서, 이광수는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일본 여자들이 보기에도 수준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것들이 좋은 것들이 많았다. 이문열의 변경을 읽다 보면, 다른 단편들이 좋은지, 아니면 이런 소설도 아닌 변경 같은 내용이 보다 알찬지, 잘 모르겠는 것이었다. 이문열도 그와 같은 갈등의 희생양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낭설과 낭인들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받는 교육이래봤자, 항상 군사력의 칼날, 총칼 아래에 있고, 이런 정도의 시니피앙적인 신화에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관심이 생기고, 적어도 그만큼이라도 공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변경이다. 그것의 모퉁이를, 이몽, 우리는 무엇이라 판단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영혼의 죽음과 물결을 보고, 고고학을 실감하는 통로로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그와 같은 레저와 스포츠를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키는 한 자인데 불구하고, 이와 같은 트랩은 여기에 두 자, 저기에 세 자, 우리 뒷쪽으로는 다섯 자나 되는 것이다. 만일 세 번 죽음이 가능하다면, 여기에 한 번, 또한 저기에 한 번, 그렇게 살다가 단 하루도 평범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일본 드라마는 일본 드라마 대로의 현상학과 형이상학이 있다. 나는 나의 키가 태어나면서부터 매우 컸기 때문에, 그것의 수학적인 치수는 늘 언제나 일본의 것에 닿아 있었다. 일본은 작고, 하나의 과학적인 원역사를 가진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현대문명이 한국어의 범선을 그림자로써 갖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해가 지면, 상해를 급하게 지나, 장안을 지나, 히말라야를 향해 갔다. 고비 사막을 지나다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이 들었다. 부탄, 네팔을 지나, 인도와 중국의 경계에서, 인도인 친구를 만났다. 인도에서부터는 나를 착각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도리어 친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친구는 가까운 구멍과 같아서, 밀도가 달라지면, 차원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나도 전쟁에 나가 죽게해달라, 그것이 부처님의 맹자에서의 첫번째 외침이셨다. 그것을 우리는 의심할 수 있는가? 친구들은 죽은 친구들의 옷을 태우면서, 그 소리를 들으면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에 휩싸였었다. 한 터럭의 구속함도 없는, 부자유함도 없는, 하나님 아들의 문장이, 인간 신체 그대로의 것이, 그들에게는 그때부터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지내면서, 옛날에는 엄마의 바다와 같은 명작을, 그 이전에는 여로와 같은, 나중에는 모래시계와 같은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훌륭해서인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드라마로 옮겨놓았는데, 그것이 우리가 보기에도 보기가 좋았던 것이고,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렇게 드라마적 형이상학으로써 진행시켰는데, 알 수 없는 힘으로써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몽의 형이상학에 비추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회의적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몽은 그와 같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자연에 비추어서, 지나치게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많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이다. 김치가 맛있다고 해서, 노벨 문학상이 많을 것이라고, 노벨 문학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세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제국주의 문학이 많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김치를 맛있게 먹고, 버려진 문학의 세상을 향해, 좀비처럼 나아간다. 우리들 시인 신현균의 최근작 유행하는 좀비의 한 구절이다. 문학의 버려진 세상을 향해. 김치는 친구와 같아서, 한국에서 거대한 작가가 나올 시에는, 주변의 멍청한 민중들이, 다들 그것이 유물론적이고, 김치 덕분이라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육십년 대처럼 살았다면 말이다. 돈이 많다고 해서, 문명진, 문명의 세상이 많다고 해서, 그들이 무조건적으로 한국 사람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육십 년대에도, 미국은 한국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팽팽한 대립관계, 긴장관계 속에서, 판문점에서 여차하면 북한군에게 권총을 쏠 준비가 된 상태로다가, 다만 책만 던져줬는데, 헌책들의 성황당마냥, 그만 떡 하니 대문호가 나온 것이다. 거대한 신체시가 나오고, 어쩌면 좀비였을 듯, 역사소설이 나오고, 모든 장르에 걸쳐, 마치 야꾸자처럼 아무렇게나 써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존재의 그림자가 신기해서, 다른 건방진 사람들처럼, 그의 작품을 그의 경제적 소유권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근대적 작가로서, 이광수 이전에 아시아에서 매우 유명하였던, 조운봉이라는 사람의 달과 여섯냥이라는 장편시가 거의 모든 작가의 원인이 되었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하는 것처럼, 외국 작가의 것은 철저히 못 읽게 하고, 그래도 갑자기 월등한 관념의 작품을 그의 보이지 않는 선생의 영향으로 놓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해에게서 손녀에게. 그래서 찾은 것이 김치였고, 김치 쥬스 같은, 특히 동치미가 그렇게 그것의 연극적 상상의 내용을 채워주는 것이었다. 동치미 다이어트, 동치미 쥬스, 동치미 학과, 동치미 시인. 동치미 김윤식. 동치미 이몽. 최영미. 일본에는 그와 같은 무식한 원인의 드라마가 차단되었다. 워낙에 많은 젊은이들이, 아무런 관념도 없이 죽어가는 것을 경험하다 보니까, 죽어도 좋으니, 그들 과거 제국주의 미학은 싫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미시마 유키오가, 일황을 찬양했는지, 일황을 죽였는지는 어떠한 수학자도 풀 수 없는 난제인 것이다. 일본은 서양에 대한 염증이 있었다. 처음에는 희망을 품었다가, 계속해서 단자리 수 계산에 능해지다 보니까, 염증을 진단하게 되었고, 그에 맞게 처방하게 되니까, 드디어 그들의 정신병력이 많은 치유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의 현상학이 그들의 영화였던 것이다. 드라마 이몽은 염증인지, 아니면 현상학인지 우리로서는 자신할 수가 없다. 염증인 것은, 일본과의 비교문학적으로다가, 말초도덕적인 우위만 있을 뿐이지, 수준이 여성세상에도 미치지 못하고, 갑자기 급락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현상학인 것은 처음으로 그와 같은 간극을 세계 각국에 보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은 필사적으로 주자의 글에 파고들려고 한다. 자기들은 원래 혁명가인 것이고, 니체나, 괴테를 읽으면서, 맑스, 반듀링론, 어쩔 수 없이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몽은 묘하게도, 그와 같은 황금율을 버리고, 계집질이나 하다가 테러를 일으키는, 그러니까 폭로율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자청년을 가리켜, 사람들과 함께 웃었던 것은, 자연적인 겸손도 미쳐 챙기지 못할 그것의 낭떠러지 사탄과 같은 낙차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연애질을 하다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자본주의.

자유주의.

제국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