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심각한 이몽 후유증에 사로잡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말이, 그것은 엔드게임? 하루 공부를 마치고, 친구의 자취방을 찾아가는 여대생이 아닐까 한다. 여고생도 좋지만, 왠지 고생하는 것 같고, 여대생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추운 가을 날, 방학 어느 한 날,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대학생이 아닐까 한다. 둘 다 죽음에 가깝고, 우리는 사실 어떻게 연속하여 사는지 모르는 것이다. 세상에 내가 나타나기 전에는, 그런 것들은 원래 번호 없이, 이름 없이, 주어진 것이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뉴스 스크립트,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이 지드래곤과 같은 연장을 담당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에 내가 나타나, 오래 살자, 비슷한 자기들의 시간이 발견이 되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끝이라는데? 잘 모르겠지만, 그와 같은 협박이 친구 둘 사이에 그만 먹히고 만 것이다. 옛날에는 학생 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차양이 그렇게, 만남을, 어떤 여가를, 심지어는 문학 공부를, 하나의 단위로써 인식케 했었다. 어렸을 때는 각종 수생 식물들이나 동물들을 보았고, 개구리 왕눈이 같은 명작을 보았으며, 학생 운동의 한계를 보았고, 항상 그것의 열등한 존재로서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같은 공부를 이어갔었던 것이다. 그것이 결론이었으나, 그것의 이상을 뽑아내면, 항상 그것이 기준이 되어, 내가 나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 보니까, 도리어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대학이라는 시간이, 통째로, 하나의 섬처럼 인식이 되는 것이다. 우리 때는 이런저런 패쓰 시스템이 없었는데, 지금은 한 번 다니는 대학이다보니까 그런 것이 생긴 것이다. 그것을 열등하게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싶다. 사람은 개구리와 같고, 대학까지 간다는 것이 미친 세상의 이차대전과 같은 의미와 무게, 가치와 값어치를 가지는 것 같다. 사람이 어떻게 육체의 한계를 이겨내겠는가? 대학이 그것의 울타리를 과시하면 할수록에, 다만 드러나는 것은 육체의 한계인 것이다. 본질은 흉내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울타리가 없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대신에 흉내는 흉내내기가 쉽다. 그래서 울타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본질이 있다. 그것이 그렇게 옥시모론같고, 패러덕스같고, 둘다 회사 이름 같고 그런 것이다. 남자들의 이성은, 대학을 고공비행하는 중에는, 한 사람이, 그리고 서로가 얼마든지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영화 러브스토리에서도, 그것의 학기 중에는 얼마든지 그렇다고 하는 것 같았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보면, 정말이지 그와 같은 강력한 보디체크로 살아가는 것 같다. 영화가 옥시모론인 것은, 대학에서는 소설이나 문학에서의 영체에 가까운데, 다만 법률회사에 취직한 것이 될 것이다. 철학은 못해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그런 목소리가 우리 모두에게 들리는 것 같았다. 문학과를 다녀도, 단명으로 끝이 나는, 문종이나 단종 같은, 시문학이나 그것의 창작에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타리 무우 김치를 담글 수 있는, 그것을 담그는 남자라면, 그것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향기를 내뿜는 것이어서, 당연히 비평의 구조를 향해가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비평의 구조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이 너무 슬퍼서가 아니었는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동일시가 너무 컸던 것이다. 그것을 형식적으로 의식하기에는, 우리들이 너무 약하고, 진실로 마음이 착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대통령이나 군부가 되는 것 같았다. 문학이 얼마든지 권력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의 첨성대와 같은 존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동시에 알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기도 하였었다. 우리들에게는 전진과 진보의 사회적 조건이 일단 처녀지들 같았다. 그러니까 무조건 악했던 것이다. 하나는 가난하였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번 사는 생명에 값하는 미적 감동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실이 다른 구멍을 찾아 바늘 오르고, 불필요한 곳에서 다시금 내려가는 것 같으나, 영화를 보면 항상 레지던스, 그러니까 다방 레지들의 그릇을 찾았던 것이다.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을 보면, 그것의 지나친 엣지를 적당히 다듬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박중훈도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다만 세련된 문자를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그것의 석탄은 막강하였던 것이다. 어디 돌아다니기만 해도, 금세 이성적인 사유로써 시컴해졌던 것이다. 다만 역사극을 보는 것만으로도, 성경 속에서의 갑옷이 어깨에 덧입혀지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동학농민군이라는 신생 신화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항상 지리산에 내리는 거대한 태양과 함께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함부로, 혹은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 본질이라고 한다. 전쟁 이후에, 그것의 연속인 것 같은, 몽유병과 같은 민주화 투쟁을 한 다음에는, 이제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게 불가능한 것이, 본질이 된 것일 것이다. 항상 시나, 그림, 영어 회화, 영화나 섹스 같은 것에서나 그것의 본질이 잠깐 드러난다. 처음 볼 때는 드러나나, 두번 볼 때는 감추어진 것을 가리켜 또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가 존재를 거듭해가면, 반드시 본질이 된다. 얼마나 이 단순한 존재를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인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서, 존재가 단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뇌를 하늘에 내보이면서 살아도, 실상은 심해 어류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존재는 단순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나마 잘 살아온 지상의 것이기에, 항상 심해 어류적이 가능성이 그것의 실질 관계로써의 그물에 잡히고, 그런 것이나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본질이 드러나면, 성기가 드러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아무쪼록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어떤 고대 밀교의 그림으로 보고, 눈알이 돌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본질이 부끄럽다면, 존재는 더욱 부끄러운 것인 것이다. 지놈이나, 개년은 말할 것도 없다. 말이 잘 되어지는 순간을 놓치고 나면, 우리는 반드시 육이오를 만나게 된다. 여자들이 죽기 전에, 참된 고뇌의 고대 국가 왕비가 되는 순간인 것이다. 말이 잘 되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태어나서부터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타박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신에 아이만 홀로, 열살이 넘어서면서부터는, 똑똑해질 것은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대개의 국가가, 진정한 문장가가 없거나, 그것에 관한 독자의 무리가 없는 상태에서는, 군부가 문명의 외형을 담당하지 않을 수 없다. 탱크를 몰고 다니면, 그것이 움직이는 건물처럼, 키오스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심해 어류의 세계로 나아간다. 항상 그랬고, 늘 그랬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시간이 그것의 안쪽에서만 회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들은 잠깐 태양을 본다. 그리고 평생을 가난한 자기 민족과 하나가 되어 산다. 남자들도 그렇다. 숱한 선입견 속에서, 그와 같은 흥분 속에서, 마치 자기의 말이 심해 어류의 세계 바깥에 있는 것처럼 구는 것이지,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인들을 많이 죽였다고 해도 문제, 적게 죽이고 대신에 중국인이나 자기 일본인들을 많이 죽였다고 해도 문제인 것이다. 말이 짧다고 해서, 시나, 그에 관한 비평 같은 것이라고 해서, 박열 같은 심해 어류의 세계에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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