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창궐(2018)의 슬픈 회오리 바람
회오리 감자라고 있다. 언젠가부터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괜찮은 문학수상처럼, 짧고 진부하긴 하지만, 짧잘한, 그런 것이 재밌다 재미없다하는 존재가 되지 못하면, 대체 뭐가 짧잘한 것인지 우리는 모르는 것이 될 것이다. 영원히. 영화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이다. 그 큰 영화와 시간이 사람들에게 존재와 회오리 바람이 되지 못하면, 어찌 되겠는가? 시가 회오리 바람이 되는 것이 그렇게 에녹 같고, 다만 그와 같은 장르 비평이나 현상이, 어째서 민주주의와 그렇게 닿아있는지, 정말이지 지금까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모르겠는 것이다. 대한통운. 영화에는 여자 주인공이 나온다. 그녀는 청나라에 함께 가기로 한다. 그리고 청나라에 함께 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궁녀들이며, 나인들, 사람들이 미쳐 날뛰는지 모른다.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시처럼, 그 섬인 것이다. 영화는 반드시 사탄의 피라미드와 만난다. 대놓고 만나고,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천사로 있지 못하고 만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조율을 하려고 하나, 어째 그것에 능한 사람이 있겠는가 싶다. 영화는 장. 난. 치고 있다. 그 엄숙하고, 아름답고, 정답고, 고귀한 우리들의 옛 무대 안에서, 최신식의 좀비놀이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들을 읽어보았다. 실망 일색이었다. 나는, 나와 같은 권위자는, 그렇게까지 실망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범인들의 말과 글에 올라타는 솜씨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여정을 칭찬하고 격려할 만한 것이지, 어쩔 수 없이 대단한 것은 아니되는 것이다. 좀비란, 좀스러운 것을 비우지 못하는 안목과, 생각의 여정, 그리고 생각의 여정 속으로 진행되어 나오는 글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숱한 풀지 못한 문제들을 산적해놓고, 나부터 먼저 좀비가 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사람이 대학때까지 있다는 것이 신기한 것이다. 예수님의 나이는 어쩌면, 대학원까지 어떻게 버텨보는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는, 동산이 에덴동산이다. 선악과를 먹어서가 아니라, 해가 저물 때는 당연히 동산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태 맛동산을 먹는 것은, 그와 같은 카메라 기법 같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떻게 학교를 다녔는지, 공부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것은 정말이지 우리들의 삶과 같다. 한번 명사십리에 가보라. 얼마나 많은 민박집이며, 모텔들이 있는지 모른다.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도 몰려와서, 가볍게 뭘 먹고, 음료수를 먹고, 거닐다가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장황하게 하는 것은, 그런 것은 대학까지 나오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수많은 교과목들이 얼마나, 코레오그라피, 무용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붙잡고 삼천궁녀처럼, 낙화암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바깥에서 꽃잎들이 불어 날리면, 꼼씨꼼싸, 혹은 메르씨, 혹은 싸바,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때에 우리는 만화책을 읽는다. 그것은 만화책과의 결혼이다. 모범생이, 모범 택시 드라이버, 만화책을 잘 읽지 않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아직은 결혼할 때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가나의 혼인잔치처럼, 우리는 시시때때로 그와 같은 세계관 처녀와 결혼하는 것이다. 아직은 읽을 것이 많은데, 아직은 판단하고, 조율하고, 아직은 계몽할 것이 많은데, 닭 한 마리가 거대하게 변한 다음에는, 엔드 게임, 사람들을 꿈을 꾸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데미지이다. 나는 오늘 콘테이너를 보면서, 별 데미지가 아닌데, 그것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것이 속도에 기여하는지, 아니면 참칭에 기여하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데미지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오래되어 다만 살짝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창궐은 거기서도 첩보 활약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구석을,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야릇한 슬픔을 제공하는 것이 있었다. 얼마나 우리는 창궐을 본 다음에, 나는 그렇게 상상하는데, 마땅한 비평이 있을까 미쳐날뛰었던 것일까? 창궐이 그렇게, 이야기적 구조의 클리쉐를 지나, 주자인 현균을 치고, 소재에 있어서 광주 법원 내에 있는 소나무와 바위 한 덩이처럼, 독보적인 것이 있는 것인가? 드디어 내가 제목으로 정한, 누군가의 글을 읽고, 힘을 내어 적고자 했던 주제에, 형식적으로, 단어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창궐은, 영화에게도 충분히 가능한, 일종의 뼛속까지 민중 영화에 대한 비젼, 그와 같은 주자의 회오리 바람이라고 하기에는, 일종의 기회주의적 결혼의 원죄를 씻을 수가 없다. 정말이지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이, 신약성경의 갈라디아서처럼, 갈라서고 있다. 대사들도 그렇고, 행동들도, 그렇게까지 조선시대 항목의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원래 난 그림은 항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항목은 무엇인가? 일종의 월드컵 한국 경기 같은 것이 아닌가? 베트남 아시안 게임 경기 같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분명 관중하는 것이 아니라, 철옹성의 대문을 부수는 항목 같은 것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점점 더 빠지는 느낌이 든다. 그 순간, 우리는 이 영화가 처음부터 그것을 계략하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우리는 순간, 서울역 근처에서, 소머리 국밥을 친구와 먹고, 헤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축구 경기를 보다가 흥분하여, 눈이 맞고, 남편 몰래 빠져나와 간통한 것이 적발되었던 옛날 어느 뉴스 기사가 그렇게 기억에 남고 그렇다. 나는 적어도 시라는 것은, 그와 같은 힘을 능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때 그 순간의 독서에서 결심하였는지 모른다. 우리가 난을 단 한 잎만으로 그리자면, 꽃도 있는 것으로, 그것은 엄청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눈이 맞는 일이, 이런 케이스, 일반적인 교회나 성당에서의 만남, 어떤 막연한 소문들로 한 폭의 그림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한 폭의 그림의 결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청나라 정도나 다녀와야, 우리는 우리의 몸이 난이 쳐저, 좀비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젊은이는 흥분해야 정상이다. 민중들은 감성을 아끼고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판사도 가난하지 않으려면, 천국이 우리 사는 지금과 다르지 않다는 절대적 지혜를 망각하지 않으려면, 그것을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좀비는 흉악한 소재이지만, 그와 같은 동양화를 우리는 만난 적이 없는 것이다. 왕도 그와 같은 동양화에서 죽은 것이 도리어 명예롭다 여겨지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이 다만, 미국 영화적인 결투씬, 스토리 오브 스토리, 타워, 그런 것의 한 가지라는 것이 도리어 이와 같은 관점에서는 불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 서예의 향기를 입을 수 있고, 그와 같은, 나 말고 다른 평론가가 없는 좀비와 한통속인 영화는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그 은밀함이 휴대폰의 보조밧데리처럼 아까운 것이다. 영화는 반드시 사탄의 피라미드가 된다. 영화가 그것이 아닌 것처럼 구는 것은, 때로는 불쌍한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는 것은, 그와 같은 어린아이와 같음이, 형식이, 고집이, 우리나라 영화를 통속적인 세계 영화와 구분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팝송도 그랬다. 사람들은 사탄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영화는 분명 사탄과 싸우는 것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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