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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고성 슬픈 산불

by 마음대로다 2019. 4. 5.

고성 슬픔 산불






태초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빠지기 위한 하나인지, 아니면 둘이 되기 위한 하나인지 아는 이가 없다. 우리가 영혼에게도 성을 구분할 수 있다면, 어느 민족은 여자가 많고, 어느 민족은 남자가 많다 할 것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아이가 많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하나는, 일은, 둘이 되는 아름다운 과정인 것이다. 그것들이 싱그러운 고구마줄기처럼 엮어져서, 우리나라를 만들고, 한국말을 만들고, 고성을 만들고, 속초, 양양, 동해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차로도 멋지게 질주하지만, 그것들이 따라온다고 생각하면, 때로는 기쁘고, 니클로디언, 반갑고 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나를 마치 감시하는 것처럼 따라오지 않는 적이 없다. 남자들은 벌써부터 흥미가 떨어지나, 그것들은 내게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서는, 묘하게, 미래를 약속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사실에 관한 실질적인 시간이 이러하다. 내가 먼저, 이상한 빠진 것도 아닌 것 같은 남자를 만나, 기분이 상하고, 식감이 떨어지고, 항상 죽음과도 닿아있는 고구마줄기를 만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말들을 글에다 썼다. 영화란, 스스로 아는 것이 없는, 자지가 없는 것들의 바이불이라고 말이다. 매우 독한 말이긴 하지만, 그것의 과정이 또한 두 가지라는 것을 뻔히 알지만, 기능은 순기능인 사람과, 본성이 여자인 사람들은 도리어 나를 이해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몇몇 시, 일본에서 새로운 연호를 그렇게 영화라고 한다고 한다고 했다. 나는 일본 각료들의 면면을 보면서,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을 보면서,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앵글로 섹슨해서는, 매우 불쌍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생각을 해왔다. 우리가 여자에게 버림 받은 졸부들을 어떻게 보는가? 남자들도 조심스레, 사치품들로 치장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들도 남자인 것이다. 그것들의 질주를 막을 수도 없고, 과도하게 음주 단속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부끄럽고, 두려워서, 얼굴이 빨간 것을 가지고, 수치상으로도 측정이 안 되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태초에, 그 하나에 있어, 들어오고 나오는 것을 정확히 아는 바가 없는데, 민족 전체에 걸쳐, 여성성이 강한 것을 두고, 다시금 정확히, 이것이다, 저것이다, 이 년이다, 저 새끼다 하면서, 수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의 음표는 아름답고, 그것의 꽃은 지지 않을 것만 같고, 그것의 건물은 높은 불국사의, 일본 지점의, 사람이 천 명 들어가 숙식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목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의 마지막은 칼날과 같고, 순전히 그와 같은 내면성에 의해서 칼날이 발달한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거짐 모든 것들의 것이, 형태가, 인간의 마지막 형태나, 가타나, 사쿠라 같은 것이 있음에도, 칼날만큼은 묘하게도, 한국 사람의 얼굴을 비추는 것 같은 것이다. 남자가, 오토코가, 그 정의로운 한 남자가 빠져나오진 않아도, 인구수는 늘어나는 것이다. 그것의 형이상학을 정확하게 그릴 수가 없고, 정확하게 읽어낼 수가 없다. 어떤 미친 새끼가 새로운 연호를 영화라고 한다고 하나? 불쌍도 하고, 낙타 무릎 같은 느낌도 있고, 당장에 오토바이나 억대의 연구자금을 보내지, 무슨 이런 언론플레이를 하나 하는 사람도 있고, 나도 그러하지만, 이것 정도도 충분히, 그 옛날의 낙타 무릎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네이버에다가 포토샵을 남겼다. 그랬더니 강원도에, 고성에, 속초에, 산불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우리가 공포 영화를 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화이기 때문이 아닌가? 영화는 정말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제로니제이션이기 때문이다. 한자가 엉성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는가? 나의 말에는 충분한 경고의 내용이 있었고, 그것을 산불을 통해서 교보재 역할을 누군가 도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영화가 아니면, 제로니제이션, 우리는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질식할 것 같은 것이다. 질 들뢰즈는 그것을 또한 형이상학이라고 했다. 그것은 포드와 기아, 합쳐서 현기포기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질 들뢰즈는, 입각체 같은 것을 제안했을 것 같다. 읽지 않아서 추측할 뿐인데, 입각체는, 상하가 뒤틀려 있어도, 좌우가 어긋나 있어도, 연속하는 것인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 영화 언터쳐블의 세상은 아닌 것이다. 기자들은, 그리고 댓글들은, 주자 앞에서 늘 언제나, 항구의 표현으로 말하면, 해측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주자 입각체의 영향인 것이다. 서울대 입학보다는 쉽다고 해도, 서울대생에게도 나의 말들은, 어려운 것이다. 그들이 고개를 가로젓고, 가슴이 극심하게 아파오면, 나머지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보지 못하는 세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문 방송, 줄여서 신문방송인터넷포털들이, 숱한 나에 의한 반대의 입각체를 갖는 것을 뭐라고 탓하거나, 따지거나, 준엄하게 꾸짖거나 하지 않았던 것이다. 놀이동산에 가서, 드롭하는 것이나, 회전하는 것이나, 바이킹 같은 것을 타고 오면, 자기의 말은 해측에 있으나, 자기는 어느 틈에 주자의 주된 영역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것은 오히려, 나보다도 그들이 더 전공을 잘 살리고 있지 않나 싶다. 하지만 한번 해로운 측에, 자발적으로, 혹은 비자발적으로 있고 나면, 지금껏 한번 본 적 없는 사탄의 사절들이 자주 그들을 만나러 오기 때문에, 삶이 극심하게 일그러지는 것이다. 코란에, 하나님에게 딸이 있다 하는 명언은, 사람들이 제법 순결하게, 정의롭게, 수준 높은 인격으로써 살았다가도, 결혼을 하거나, 결혼을 시킬려고 하면, 꼭 사탄이나 악마에게 찾아가는 것을, 형태를, 습관을 꾸짖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이 딸을 데려오면, 그런 사람에게는 더욱 낫지 않겠는가? 형태론에 너무 빠져 있다 보면, 질식해야 정상인 세상에서, 도리어 높이와 광채, 형이상학적 이상 같은 것을 발견하고 나면, 하나님은 믿어도, 하나님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은 믿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코란의 그 말이, 그 말이 때로는 틀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자는 여자인 것이고, 여자는 언제나 많이 부드러운데, 투첼로스의 슬픈 전언처럼, 그것을 하나님의 세상으로는 환전을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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