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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사탄의 심리학

by 마음대로다 2019. 3. 9.

사탄의 심리학 






우리가 조지 엘리엇이나, 티모시 달튼, 파스칼의 글들을 읽을 때 가장 놀라는 것은, 신학적 개념의 소환 능력이다. 물론 티모시 달튼은 운율 때문에 넣은 이름이다. 우리가 아멜리에의 춤곡을 좋아하고, 전 세계에 걸쳐, 소리소문 없이 인기가 넘치는 이유는, 그것이 갖는 신학적 전생 때문이다. 우리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프리드리히 니체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것은, 자신의 이런저런 맥심과 운율보다, 과거 철학자나 전반적인 기독교에 관한 통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강압을 하니까 시험을 치르지, 철조망도 없애고, 실제로 아무런 강압을 없게 한다면, 사람들은 군대에 입대하자 마자 우르르 나오고 말 것이다. 시험도 그렇다. 시험을 치러야지만, 좋은 것으로만 회전목마가 도는 것을, 다만 일류전이나 일류저니스트한 것으로가 아니라, 그런 것을 허락하니까 그렇지, 그런 것이 아니면 사람들은 어떠한 관념의 계단도 오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관념은 계단과 같고, 육체는 평지만 같은가? 아니면 내리막길 같은가? 대단히 무모한 일들을 벌이다가, 다치거나 죽는 필름들을 볼 때, 서양의 한 정신을 두고 우리는 놀라게 되는 것이다.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장점을 발휘하는 것을, 그런 이상한 진단과 판단을, 우리는 충분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에 대한 어떤 지향성. 그것의 중국 어느 지방 도시에 있었던, 공중 도시의 신기루 같은 것이 우리에게는 분명 있는 것이다. 관념이 계단과 같다면, 그리고 위험과 같다면, 그것이 절묘하게도 성이나 색, 혹은 포르노가 채우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그와 같은 계단을 들추어 보아 알게 되는 것이다. 파스칼의 팡세가, 이미 조지 엘리엇은 니체가 간파하고, 비판하고, 때로는 칭찬한 것을 우리는 까마득하게 잊을 정도로, 사뭇 대단하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드디어 우리 눈에는 버려진 가옥 같고, 사람들이 하룻밤 자기 위해 시멘트로 뼈대만 대충 지은 느낌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조차 몰랐던 것이다. 신학적으로, 수녀적으로, 혹은 결혼식의 신부적으로, 도대체가 자기성이 불분명한 상태로, 전통을 답습하고, 그것의 수채화를 똑같이 그리고, 똑같이 개를 끌고 오고, 끌고 가고, 하는 것으로다가 북을 치고, 낙랑공주, 북 속으로 들어가고 하는 것을, 천년이 하루 같이, 하루가 천년 같이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도 자세히 보면 충분히 실존주의적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들의 우주는 생각보다 빨라서, 금세 행성을 벗어나고, 다른 행성의 중력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파스칼의 팡세는, 진부하고, 사람들 살아 있을 때의 담론을 모아 놓은 것 같고, 프랑스의 칼이라고도 불릴 만한 것이었지만, 그와 같은 신학적인 언급이, 시간의 저울에서는 문학으로도 볼 수 있고, 시민적 의식으로도 볼 수 있으며, 신학적 언급이 신앙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 있고, 저녁에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문화사가가 되는, 그와 같은 하이드씨의 꿈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문학이, 그렇게 동양의 고전이 하늘님에 대한 언급을 차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천문의 공백을 천자문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오르지 않는 것을 어느 누가 원망하겠는가? 우리들의 문학이, 그것을 알고는 시도하고, 억지로 노력하고, 그것이 때로는 매서울 수 있다는 것을, 시치미를 떼는 것을 우리는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의 부모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기적인 부모가, 전기적인 자극과, 정전, 그래서 그 후손과 학생들이, 그런 것을 가상 체험하였다고 해도, 부족하고 빈약한 것이다. 민비를 싫어할 만한 아무런 자격도, 준비도, 민비를 가르치고, 여성적 생명이라도 보장케 할 만한 아무런 정신도 우리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서양이 문학이든, 철학이든, 소설이든, 시이든 간에, 당연히 철학이나 신학이,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에 있어서, 그들 간에 권력적인 순서가 정해지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요, 그들 간의 내통이자, 학습 중에 학습이 되어왔던 것이다. 파스칼이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은, 기독교가 비교적 완전하고 완성적이었다는 증거이다. 파스칼의 팡세가 환영을 받는 것은, 기독교가 숱한 형식적 모순을, 아주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는, 성경의 쓰여질 때부터, 그와 같은 사실의 발견과 의식이 있고부터인 것이다. 대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만의 회전목마 안에서 기술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와 똑같은 형식으로써, 대게의 기독교인들은 사탄이 무엇인지 이백자 원고지 팔십 매에 걸쳐 아무런 답변을 할 수가 없다. 우리들의 관념이 폭력이 아니라면, 그나마 색과 성과 같은 것일 텐데, 그렇다고 색이 관념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색이 지우개와 같아서, 그것이 모두 닳게 되면, 우리는 얼마나 멍청해져 있겠는가? 



사탄은 거기에 있다. 


신학이 처음에는 청년과 같다가, 오래되어, 그리스 조각상에 흡수 통합되는 자리가 그것이기도 하다. 


사탄은 늘 동양의 성취를 보고, 그것들이 전부 비본질적일 것이라고, 그러니까 사탄적인 간계의 결과일 것이라고 과신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동하곤 한다. 그것이 죽도록 우습고, 그런 사탄들이 서양의 학생들을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가르칠까,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습고, 흥분되고 그런 것이다. 사탄은 일본과 한국이 싸우면, 반드시 어느 한 편을 들어야 한다. 둘 사이를 중재하고, 화해하게 하고, 문화와 경제를 교류하게 한다는 것은, 사탄이 서양의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행동인 것이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우리 민중들은 이와 같은 사탄의 파리미드 안에 있을 수가 있다. 


그것은 늘 언제나 살아있는 사건이요, 현상인 것이다. 사탄은 결코 완벽하게 가루가 되어 있는 입장을 요구하지 않는다. 티비나 드라마, 쇼나, 엔터테인먼트, 기사나, 숱한 즉각 반응 같은 것을 보면, 전부다 나를 향한 선명한 반응들의 일관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한말 일본에는 김옥균을 처음에는 돕고자 애쓰는 집단이 있을 수가 있었는 것이다. 원거리 사탄들일수록, 일본의 입장이 선명하지 않으면, 자기들 심리학의 근대사가 엉망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태공조는 어떻는가? 태공조는 정말이지 사탄 같은 것들이다. 일본의 입장이 선명해지는 것을, 도리어 다른 각도에서 좋아하고, 보다 조장하는 쪽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섬 이름 하나는 규슈이다. 그리고 다른 섬의 이름은 시코쿠이다. 그것의 뜻은 강코쿠이다. 그것의 산문적인 뜻은, 본질은 오래 가고, 그것은 철학적 개념인데, 매우 성적이어서, 우리 집안 사람들을 많이 죽였어도, 그들의 딸이 한국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이 우주에, 이들 제주도 같은 일본 사람들이 없다. 울릉도 같은, 회전목마가 금세 닳아지는 사람들이 없다. 자동차는 회전하면서 오래가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의 그림과 풍경은, 건축은, 시와 산문들은, 어린아이들이 흔들면서 타기 좋아했던 백원짜리 목마와 비슷하다. 그것의 중심을, 마음의 높은 본질을, 예수님은 십자가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과 태공조가 국제적 관계의 선명성을 요구하자, 거기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악마는, 선과 주자의 반대 입장에서 선명한 그들 피의 교환을 이어 받고 산다. 그러니까 주자와 선만이, 선명하고, 섹스하며, 그림을 잘 그리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닌 것이다. 상당 수준의 지분을 사탄은 세계 문명에 갖고 있다. 그것이 모두 빠지거나 철수하면, 중심 기둥이 모두 빠지는 선진국들이 꽤 있다. 태공조가 사탄의 입장을 손 들어주는 것은, 순전히 사람들 때문일 수가 있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할 수록에, 지진은 지옥에의 첩경이었다. 문명이 발달하면,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서 아주 잠시 망설이고, 거울을 보며, 다만 그와 같은 부정적인 형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문명이 발달한 것이냐 할 수 있는데, 사탄과 싸워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 



할 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