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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고전이란 무엇인가?

by 마음대로다 2019. 2. 20.

고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있다. 우리는 항상 피를 흘리고 있으며, 의식은 아주 말짱하다. 몸은 피곤하고, 쓰러져 넘어질 것 같고, 하지만 의식은 날선 칼과 같고, 스즈키 가따나만 같다. 우리는 언제나 소년 같고, 소년 시절의 미지수를 떠올리면, 국가 전체가 좋아하게 된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보자. 사람들은 갑자기 니킥을 받는 듯 할 것이다. 우리들은 어떻게 스토리에 접혀드는가? 아니면 이미지즘으로다가, 매 분, 매 순간, 갑자기 방에 들어온 매형처럼 알 수 없는 오브젝트로 변하는가? 스토리가 지겨워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우리가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스토리가 지겹지 않을 것이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이겨내면, 스토리는 급격하게 지겨워지는 것이다. 영웅주의 같은 것이라고도 하고, 국가 이데올로기라도 한다. 소시민적인 적당주의 순응주의 세계관이라고도 한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보면, 매우 고통스러운 이미지즘 같은 것이 있다. 사람들이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보면, 수애가 너무 멋지고, 예쁘고, 이지아가 예쁘고 할 것이다. 나는 나의 채널이 어떻게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인 기호가 될 수 있는지, 항상 의심이 들고, 그렇다. 수애를 보면,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조그만 아이가 생각나고, 이지아를 보면, 그렇게 사적으로도 공부하고 싶었던 이사야가 생각나고 그렇다. 공부는 옆에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있다. 혼자서는 이사야를 공부할 수 없다. 서태지가 부자이고 나니, 이지아도 부자일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내가 만일 신학을 다시 공부한다면, 이사야를 할 것이고, 그래서 그녀가 스페이스와 타임을 보장하게 된다면, 나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저녁 드라이브를 그녀와 함께 떠날 것이다. 이사야는 슬프고, 역사가 있고, 단절이 있고, 백번의 역사보다는, 성경의 단절이 가장 본질적이어서, 비교 대상이 없는, 드디어 백상 예술대상을 거머쥔다면, 갑자기 학자 한 사람이 호명이 되고, 트로피를 받게 된다면, 다 그녀 덕분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수상 소감을 말하고 싶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는 그렇게 이미지즘과 단절이 있다. 나는 요즘 사회적 핫한 이슈 중에, 집총 거부의 논란이 있는데, 드라마를 모두 보고 난 다음에도, 총기류에 대한 관심이 그랬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정말 사람들이 죽는 것 같았고, 어째서 그러한 실재감이 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추운 겨울 날, 바로바로 영화를 찍었는지, 드라마의 마지막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김이 새차게 나오던 것도 생각난다. 이런저런 아이리스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던 것이다. 미국을 필요악과, 사회악, 자연악과 경제악, 그런 모든 마두로의 안타고니스트로 삼는 것이 매우 빼어나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니 그와 같은 감정이 생각해 보면, 매우 잘 플랜되어서, 결과적으로도 잘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수애가 총을 마구잡이로 쏠 때는 예쁘고 하고 싶다가, 수애는 수애대로 사랑스럽고, 총기류는 총기류대로 사탄을 각성시켰던 것이다. 공부 못한 사람들이, 거만하여서, 총기 오발 사고를 일으키듯이 사람들을 끌고가는 것이 미국 영화의 이런저런 패턴들이다. 그런데 아이리스 시리즈의 대미에서는, 다들 아까운 수재들이 죽어가는 것 같았는 것이다. 그것의 얼굴이 그렇게, 부처님의 얼굴들 같고, 안타까웠었다. 사람들에게 고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와 같은 갈림길에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기 유행 드라마였던 드라마를 다시 본다는 것. 그것은 적어도 그와 같은 짝을 만나겠다는,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숨겨진 주자학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형이상학은 모른다. 아니 형이상학은 물리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들을 상회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일 수가 없다. 형이상학은 존재론과 같은 것이다. 존재론은 존재의 자기의식적 학문이기 때문에, 다만 학문적인 패러다임만 없을 뿐이지, 인간 개별자는 도무지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형이상학도 마찬가지이다. 고전이라 할 때, 예수님의 옷자락이라고 만졌던 혈루증 여자의 심정과 같은 것이다. 수가성의 여인과, 혈루증 여인, 그리고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던 여자를 등장시키면, 복음서 기자는 세상 연애 소설은 다 쓴 것이라고 자만했을 것 같다. 분명, 그것은 사실은 맞는데, 너무 남자다운 한 길이 거대해서, 그것이 그만 사도 바울에게도 눈에 띠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연애를 통해서, 형이상학을 짐작하는 것이다. 세상에 보이지 않는 형상이 있고, 그것에 나의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만 전쟁의 여신 아테나에서 잘못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들의 삶이, 그와 같은 드라마마저 해보기가 많이 어렵다는 것이다. 특별한 주자의 채널이지만, 사람들도 같은 것을 사용하게 되고, 도리어 주자를 괴롭히는 연못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천국의 계단은 피라미드에서처럼, 마르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터키 어딘가에 있다는, 석회질의 연못처럼, 그렇게 층층이 되어 있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연못에 들어가면, 나오지 않게 되고, 그것에 하늘이 닿게 되고, 구름이 지나게 되면, 마치 국가 사정기관이 지나는 것처럼, 힘이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처럼 연못의 계단을 보게 된 다음에야, 영화를 보고, 힘이 빠진 뒤에, 다시 영화를 보고 힘이 빠질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의 가인처럼, 어째서 사는 것인가? 우리는 다만 영화를 보고 힘이 빠지기 위해 사는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