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민중문화이야기

회전의 출구

by 마음대로다 2019. 2. 3.

회전의 출구






갑자기 우리는 말문이 막혀 있다. 티비엔이나 오씨엔이 뭐 특별한 것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바벨처럼 중간 지대를 찾게 되는 것이다. 하나는 스카이캐쓸. 다른 하나는 티비엔이나 오씨엔. 다른 하나는 신현균의 포토샵. 먼저의 두 개도, 완전히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나도 뭐 대표적인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내가 나의 과거의 빛을 돌아볼 때, 나의 가난한 외모와, 옷차림, 가난한 지갑과, 가난한 자기 의식이 아니라, 내가 이미 철학을 시작하고, 학교 공부의 수렁에서 처음부터 벗어나 있었으며, 자기만의 도장, 그러니까 범우사 사상문고 시리즈를 혼자서 독파하면, 내 나이 삼십에는 한국에서 걸출한 문학사상가가 나올 것이라는, 그것이 내가 될 것이라는, 끊임없는 쪽지 시험, 그리고 사람들의 숨가쁜 표정들, 우리나라 문학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음악이 신승훈과 이승환, 이문세와 다른 새들과 더불어서 승승장구를 해나갈 무렵, 그와 같은 롯데 타워 꼭대기의 불빛을 보자면, 그렇게 영롱하고, 만물의 영장, 영장류 중에 영장류 같고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연상이 된다. 그렇게 드라마가 좋더니만, 곧 있으면 할 것이고, 길게는 반년 정도면 할 것이나, 만일 우리가 극한직업이나, 나와 같은 경우는 스카이 캐쓸을 오분도 채 보지 않았으니까, 확실히 나는 인물보다는 스토리를 입고 있는 인물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것에 금식을 하고 있으면, 지금 우리들이 매우 드라마적 금단 증세를 느끼고 있구나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문학적 흐름에 문제가 생길까 싶어서, 스카이 캐쓸이 그나마 문제적이고, 개성적이며, 많이 대중적이다고 사람들이 내게 알려왔다. 나는 그러나 그와 같은 통신이, 야지에서 독수리 독수리 하나로 들려와도, 감도가 매우 좋지 않다고 반응하였던 것이다. 오늘은 어떤 포토샵을 하려는데, 또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손더게스트가 무료 드라마로 브이오디로 있는 것을 보고, 또한 보고자 하였으나, 마치 저쪽 산능성이에서 죽은 동료의 시체처럼, 그의 사진처럼, 다시 돌려보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스카이 캐쓸은 좋은 방향으로도, 내게로도 오는 것이 있었고, 안 좋은 방향으로도, 사탄에게도 어프로치하는 것이 있었으며, 유명한 미국 삼류 에스에프 영화 스카이 라인으로도 접어드는 것이 있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피아졸라의, 서로가 서로의 목을 조르는, 오블리비온에 빠지고 만다. 대체 주자에 가까운 상황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우리들의 생명과 어떻게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 것인가? 우리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보자. 얼마나 우리는, 그랬는가? 우리는 외국어는 잘 못했지 않는가? 지금도 그렇고, 그것은 구조주의적으로도 그런 것이다. 구조주의라는 것은, 미학이기도 하고, 학문이 아니라는 뜻, 외국어는 못한다는 언어학이기도 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구조주의에 노출되어 있다. 오블리비온처럼, 그것을 모르는 방향으로, 마치 아는 사람처럼,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나아가는 것이다. 현빈은 슬픈 북한 군인처럼 불쌍하고, 박신혜는, 박신혜는 드라마가 곧 끝이 난다는 것을 알고는, 마지막 코트를 그렇게 아름답게 입고, 그렇게 드라마가 막을 내렸던 것이다. 또다시 신현균의 포토샵만 연속하는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굴욕적이고, 굴이 맛있다고 해서 먹었는데, 한 주먹만 하고, 어느 일본 여행 프로그램을 보자니까, 짜기만 그렇게 짤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들 기자재와 권력들, 그리고 방송기자재들에 비추어 보면, 진정 굴욕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한석봉과 같은 그들이 드라마를 만들고, 쓸쓸하고, 남해안 바닷가에 있는 내가 그것을 평론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친구도 같고, 연인도 같은 사람들이, 박신혜도 처음으로 런닝맨 같은 쓰리 디멘져널 프로그램이 이름 값을 한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드라마는 끝이 나고 만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드라마는 무엇인가? 그 아름다운 성장은 대체 무엇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입혀지는 것인가? 우리에게 항상 있는 것은 무엇이며, 인간은 주로 정말이지 물로 이뤄진 것인가?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제네레이션은 섬과 같고, 군대를 옛날 같은 시간으로 한동안 다녀오고 나면, 다른 제네레이션과 싸워야 한다. 싸우지 않는 항상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란, 차분한 말씨와, 온화한 표정의 국문학과나 그러하지, 거의 대부분의 일상, 일반, 유행하는 학문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얼마나 사탄은 사람들의 뻔한 무의식적 공간, 빈터, 지능이 닿지 못한 곳에, 차원의 카드를 많이 심어놓았는지 모른다. 일본은 어떻다, 중국은 어떻다, 유럽은 어떻다, 현대는 어떻다, 댓글들을 보다 보면, 세대는 세댄데, 온화한 표정의 국문학과생도 가지지 못하는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것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 세대가 단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아주 약한 국문학적 신호와 기호가 그것을 끌고 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런데 파괴적인 차원의 유사 신학 같은 것이, 그 모든 것을 연결하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굉장한, 때로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들 댓글자들도 보면, 모르고 그런 것일 수 있다.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또다른 일반적인 안티테제였을 뿐인 것이다. 그나마 왕관을 씌워주니, 안티테제인 것이고, 안티인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들도, 논리학적으로, 혹은 반도체 현상적으로, 다름 아닌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거의 전부가, 이전 것에 대한 언급, 논리적인 부정성, 부정항목들의 포지션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것이, 대단한, 사회적인 이목이 집중될 대로 집중되어 있는 사람들의 쇼같은, 그런 드라마에 거울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포토샵을 한 것에, 나의 비평은 오래되었고, 나의 문학도 오래되었으나, 포토샵이 새롭게 인상적인데, 그것에 거울을 비추는 것이, 어찌 보면 신기한 것인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내가 대단해서? 어디가 대단해서? 내가 조선의 임금이라서? 조선이 무슨 왕정시대도 아니고, 나의 빛과, 바람, 내가 섬기고 충성하는, 훌륭한 문재를 평가하고 알아보는 능력으로서, 숱한 대감댁 사람들 사이에서 세자 책봉을 실시하는, 그런 시스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과거에도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지 않는가? 판소리를 보자. 그것이 평론이라는 말인가? 판소리를 들어보면, 그냥 극 형태의 것이 아닌가? 만일 판소리를, 우리가 엄격하게 무엇인가를 판결하고, 무조건적으로다가 대상에게 쏘리 사과의 예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판소리는, 자세히 보면 우리들 비근한 국문학에 대해 그와 같은 말을 일찌감치 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덜된 드라마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나 스카이 캐쓸은 굴욕적인가? 아이들의 인형 목을 계속해서, 붙였다, 뗐다, 붙였다, 뗐다 하니까,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눈을 어떻게 붙였다, 뗐다, 붙였다, 뗐다 하는가? 저질이고, 시작이, 절반이, 그것에 또한 절반이 무리데쓰네인 것이다. 우리들이 가난한 것이고, 서울대생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불쌍한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르는 것인 것이다. 뭐든 익숙해지면 구멍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맹렬히 회전하는 구멍이, 창작과, 창조, 그리고 백제와 제국주의 지식이 대결하는 자리에서, 그와 같은 승급된 우주에서, 다른 도형으로 자기를 도무지 바꿔낼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익숙함과 기계공학적인 회전이 없이, 우리 사회는 돌아갈? 수가 없고, 나 또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대에도 얼마나 제법 신사 같은 사람이 많고, 용모도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은 지 모른다. 그것이 서울대학교와 오버랩이 되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한신대와 같았던 손더게스트, 그것의 정신적인 영향으로서의, 카톨릭대학과 같았던 프리스트, 영원한 대결만 같은, 김일성종합대학과 같았던 알함부라 궁전의 추억, 거기에 지금 동경 대학과 같은, 게이오 대학, 와세대 대학 합작과 같은 바벨이 등장하는 것이다. 스카이 캐쓸이 일본 영화 같지만,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지식인들과 양심들이, 은근히 심적인 고통을 느꼈던 것 같다. 어법만 일본식의 것을 따왔지, 자기들도 굴욕적인 것을 먹고, 일본 사람들에게도 먹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살고, 드라마에 죽는다. 우리는. 현대인은. 그것이 스카이 캐쓸이 얻어내는, 그러니까 드라마가 드라마 외적으로 얻어내는, 인류의 구조주의로부터, 몹시도 이상한 전진인 것이다. 나는 보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연옌들이 아니냐? 사람들이 애타게 묻는데, 내가 좋아하는 연옌들이 맞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보지 않는 것이냐? 한 마디도 않는 것이냐? 그렇다면, 그 많은 한국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같은 피라미드가 아니라는 것인가? 그와 같은 두려움이 티비 조선의 바벨을 만든 것 같은 것이다. 아무런 내용이 없고, 살인 사건이라는 또다른 장미 한 송이가 등장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연옌이냐? 혼또니,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들이다. 지금이 방송할 시간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보게 된다면, 그것은 내 삶과 죽음의 혼이, 혼또니, 좋아하는 연예인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바벨에는 서울대학교도 있다. 그런 촌스러운 성품에, 성적인 화려함이 아무렇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