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열사는
처음의 단계에서도 말하기가 어렵고, 자료가 있다고 해도 가능하겠는가 싶다. 두번째의 의미에서는 대충 시도할 만 하지만, 도무지 오래갈 수가 없다. 세번째의 무선 통신의 경우에서나 겨우 우리는 저마다의 입김 가득한 마스크를 벗고, 말 몇 마디를 시도할 만 한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 그것은 도무지 부속이 맞지 않는 것이다. 분을 쓴다는 것. 그것은 화분을 갖다 놓는 것 같을 것이다. 프랑스 영화 레옹처럼, 우리는 시를 쓰지 못하고, 총이나 쏘다가, 상호 쏘다가, 겨우 화분을 들고 가는 모습이나 사진 찍을 수 있는 것이다. 김주열 열사는 무선 통신 중에서도 무선 통신, 한국에서나 활발한 와이파이에서나 겨우 이야기될 수 있고, 예가 가능하며, 이와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 매우 이상한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기억은 무선 통신과 같다. 내가 내 기억 속에서 지갑을 잃어버리면, 그것이 내 지근거리 근처에 있다고 해도 속수무책인 것이다. 거의 모든 공간이며, 서랍, 게배 같은 것을 찾는다 해도, 그 찾는 시간만큼 우리는 공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는 중심이고, 공부는 영화이며, 공부는 학교이다. 교과서가 없대도 학교를 가야하는데, 다만 숙제를 못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교육중심주의적인 사유에서, 늘 자유롭지 못하는 것은, 영원히 구속되어 있는 것은, 우리들의 미래가, 우리들의 정신이, 우리들의 공통 사회적인 자유가 바로 그와 같은 교육의 끝에서 만나는, 자유의 표현에 의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헤겔이 말한 바, 동양은 한 명의 자유가 있고, 서양은 시민 모두의 자유가 있다 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교육과 문화의 상보적인, 상호창발적인, 시민사회 철학적인 시스템을 언급한 것일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왕의 자유의 틈에서 새어나온 시와 문법, 그림과 텔레비젼이, 수평적 피라미드의 끝에 있는 숫자의 사람들이 지나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신학적이며, 문학적이고, 과학적인 길을 지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왜 어째서 우리는 그와 같은 단 하나의 길을, 헤겔이 말한 바, 서양의 수많은 시민적 군주의 길을 가야하는가? 프랑스 혁명기의 길로틴은 그렇게, 시민적 군주들의 죽음을 뜻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학은 철학과 문학에서 말하는 운명을 뜻하는 것이다. 철학은 공간을 철로 채우고, 문학은 종이로 채우는 것이다. 수학은 습기로 채우는 것이며, 저수지의 물을 터뜨리는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수학으로만 농사를 지을 수 없고, 가뭄이 들어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메마른 문학과, 힘겨운 쟁기, 그리고 곡괭이인 것이다. 음악은 수학을 많이 닮았다. 우리가 보통, 싫은 사람이나, 사랑에 있어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가리켜, 이 음수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금수도 있고, 음문도 있으며, 음철도 있는 것이다. 음악이 철학적 함정에 빠지지 않고, 아름다운 문학이 되기에는 얼마나 어려운 과정이 있는 것인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가수다 하는 것도, 어쩌면 이름을 지은 사람이 금수를 가리킨 것일 수도 있다. 존재는 그대로의 키를 유지할 수 없고, 반드시 변화가 된다.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변화한 것은, 모든 변화의 종지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에는 분명 어린아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졌으나, 과정 중에 그만 우리와 헤어지게 된 것이다. 도리어 그처럼 변화하였다는 것에서, 인간적인 옷이 입혀진 것일 것이다. 세상 누구도 나처럼 해석하는 이가 없다. 우리의 생각은 빠르고, 우리는 유선, 무선 통신을 하다가, 파이브지, 영원히 무선이 될 수도 있다. 우리들의 옛날은 무선에 가까웠다. 일제의 침략에서도 우리는 무선에 가까웠고, 육이오의 남침에서도 우리는 무선에 가까웠었다. 우리가 우리들의 선한 이웃에 팔이 닿지 않으면, 누군가 피를 쏟아주었다. 우리가 우리들의 이웃이 배에 올라타지 못하면, 누군가 피를 쏟아주었다. 우리가 우리들의 통신에 열을 올리는 것은, 믿을 신, 혹은 소식 신이, 하나님의 고운 신과 이름적으로 닿아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옛날에, 그렇게 합격자 명단에, 박씨, 김씨, 민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쉐도우 정치를 한다는 것처럼, 가득 차 있어도, 신씨가 있으면, 그리고 신씨가 죽으면, 묘한 감정이 있었는 것이다. 이승만도 통신이었다. 신익희가 누군지도 모른다. 신씨 성의 사람들은, 행여 문자와 통신의 기초 반열에도 오르게 되면, 시를 쓰고자 노력하여야 한다. 신흠의 시가 좋고, 김부식의 시가 좋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김부식은 처음 이름이, 본 이름이, 신씨였을 것이고, 처음으로 격한 발음의 사람들이 재산을 많이 갖게 되고, 처음에는, 그리고 그리 되어도, 그것을 조금도 선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성을, 고씨로 바꾸었을 것이다. 신씨는 신발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이 된 신분으로써, 왕이 되어서, 사람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먼저 죽음으로 가는 것을 많이 경험하다 보니, 고백록, 그러니까 본래의 신씨로, 푸른 색의 빛깔로, 우리나라 말로써의 청색과 녹색으로, 화이트는 기본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음악과, 단어, 그것들의 무한적인 진행의 소리가 지배적인지, 아니면 그 모든 소리들의 권력적인 근거로서의, 철물적인 부딪힘이 있고, 오직 그것만이 연장하는 것인지, 우리로서는 그 어느 것도 자신할 수가 없다. 조선의 역사도 그렇다. 우리가 그렇게 억울한 구한말을 살았던 것은, 행여, 나중, 우리들이 세계 선진국이 되어서, 무능한 문화주의자나, 그와 같은 사람들의 군집이나 구성할까, 우리들 공통의 무의식이 걱정해서가 아니었을까? 가따나도 그렇다. 스즈끼. 혹은 스즈키. 그것을 광고 필름 찍는다면, 반드시 일본 가따나 만드는 곳에 갈 것이다. 그리고 간단하게, 발갛게 달아오른 철물을 망치질 하는 것을 찍을 것이다. 아무런 특이점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 오토바이 이름을 가따나라고 지었으니까, 후대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그리하는 것이다. 그렇게 철물을 때리는 소리가, 가따나 가따나 그러는 지 모른다. 그것이 한국 사람이 아니라, 외국 사람들에게도 그렇겠는가? 때로는 철, 철, 그런다. 그것이 외국 사람들에게도 그렇겠는가?
우리는 처음에서도 아무런 힘이 없고, 자료도 없고, 자료가 있어도 차마 읽을 수가 없고, 두번째의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의미는, 우리가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관례적이고, 동시에 수사학적인 차원에서도 발성이 어렵다. 우리는 무선하게 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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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이 있다면, 이상이나 동인으로도 하겠지만, 앞으로는 김주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무능력이, 그것은 또한 영원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의 공부할 수 없는 어려움이, 우리들의 힘 바깥에 있는 레토릭에 더 이상 고통 당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길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다만 역사적인 의미에서 언급되었고, 숱한 전쟁의 비참한 사진들과 나란히 있었지만, 그의 사진은, 우리나라가 세계 무선 통신의 황금기에 이르러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아들의 얼굴이 된 것만 같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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