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민중문화이야기

사탕의 역사

by 마음대로다 2019. 4. 20.

사탕의 역사 







언어의 능력은, 우리들의 고전은, 어느 정도 목각인형처럼, 그것을 알고,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처럼, 그것의 맨처음은, 우리들이 아는 정자처럼 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것을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작은 나무사각형에 들어가서, 다음 사각형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나무가 되어, 어느 노래 가사처럼, 먼지가 되어, 나의 눈과 코, 입과 귀, 그 모든 것들이 나무가 되었다면, 우리는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무가 살아있을 때도 살아있는 것이요, 죽어서도 향기와 용도가 있는 것처럼, 그것이 우리들의 손에 산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살아있다는 상징과 문학 흉내는 될 수 있어도, 또한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정우가 자기만의 방에서, 그가 아닐지라도, 가뇽의 오아시스를 판 틀어놓고, 커피를 마시면서, 창을 내다보면서, 살아있눼 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그 영화도 보지 않았다. 뭐가 살아있는 것일까? 자기가 어딘가에서, 나무 목재로, 어떤 가구로써, 형태 절대 바뀌어서, 며칠 동안을 먹지도 싸지도 않고, 땀 흘리지도 않고, 다만 그 지내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적어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면, 갑자기 그 빈 공간을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을 놔두고, 돌아와서는, 자기가, 그리고 자기가 거기서, 사라있눼 그냥 그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사탕은 봉지 속에 있다가, 잠시, 아주 잠시 하늘을 보다가, 빛을 보다가, 사람 속에 들어가, 녹다가, 날씬해지다가, 성질 급한 사람을 만나, 산산히 부서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의 역사는 참혹하고, 세상의 모든 사탕 같고, 역사 같다. 예수님은 늘 비유로써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참혹함의 입구에서, 가장 높은 비유, 저질이지 않는, 고질라를 노래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러셨을 것이다. 두 가지의 사각형이, 정방형의 목재가, 같은 크기로써 나란히 있으면,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 것 같고, 무슨 말을 듣는 것 같은가? 그것의 하나는 알파 같고, 그것의 하나는 오메가 같은가? 약간의 러브스토리는, 그 유명한 미국 영화는, 그와 같은 슬픈 목재 인형, 인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학교적이며, 배움의 사각형적인데, 그와 같은 절대의 알바트로스 같은 느낌이 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준비로서의 알파, 그리고 친구를 만나는 기쁨으로의 오메가. 영화는 시간을 채워야 하고, 그러다 보니 영화 바깥을 예언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탕만 먹고 학교에 갈 수 있는가?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는가? 한국이 그것을 매월당 김시습, 그러니까 사탕이라고 불렀던 것은, 행여 방법론에 취한 중국인이, 완벽한 분자주의적 기호론에 빠져, 사람을 찔러 죽이고, 자해하고, 사탄을 섬기고, 사탄이 되고, 그럴 가능성의 한 가지를 건져내고자 하였던 것이 아닐까? 사탕에 빠지기는 하지만, 굉장히 빠르게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월당 김시습에서는, 전주대사습 놀이처럼, 빠져나오지 못하지 않는가? 우리가 사탕을 먹고 힘을 얻는 것처럼, 매운 사탕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것처럼, 사탕은 인간이 힘을 내는 인간의 역사 이전의 그 무엇을 전제하는 것일 것이다. 사탄과 사탕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탄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사탕을 만난다. 내가 최근에, 종유석과 석순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의도의 오류 가득한 기자들의 글을 위에 두고, 댓글자들이 자기들의 한정자산만 가득 푸는 것처럼, 사탕은 그 사이에서, 사이영상, 마구마구 프로야구 그렇게 공이 오고가는 것일 수 있다. 갑자기 날이 추워지고, 종로에 걸쳐 있는 최신식의 고층 빌딩에서, 바람이 불고, 눈이 날리면, 그것의 사탕이 매우 많고, 매우 조금 달고, 그러는 것의 현상인 것이다. 조개사가 한글 모음만 조금 바꾸고, 그 언저리에 있는 것은 지당한 것인 것이다. 우리는 댕댕이라고 부르면서, 참혹함의 태극을 만나기 보다는, 도리어 댕댕이가 되는 길을 가기도 한다. 댕댕이에 십년 후의 사람들이 각주를 달고 읽을 수도 있고, 그때까지 댕댕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사탕은 사탄과는 다르게, 그리고 사탄이 만든 괴물과는 다르게, 우리 사는 곳까지 도달한 이들을 가리킨다. 그것의 의식을, 살아있음을, 레지던트 바이블을, 우리는 좀체 이야기하지 않고, 괴물을 영화를 보고, 마치 사탕을 열 개 정도 먹고는, 이제는 질리는데? 하면서 먹는 것을 멈추곤 한다. 인체에 실험을 가해서, 그와 같은 피실험체들이, 대륙을 가로질러, 한반도에까지 도달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맹렬한 맹수로 키우면 어떻게 되는가? 자세히 보면, 사자가 그렇게 사람을 닮았다. 불독이 윈스턴 처칠?을 닮았다면, 최불암은 그렇게 사자를 닮았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었다가, 주사파, 주사 한 방을 맞아서, 괴물처럼 힘을 내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들에게는 주체사상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리도, 인간의 역사는 한결 같은지 모른다. 이렇게도 똑같은지 모른다. 러브스토리가 그 수많은 선배들과, 후배들을 염두에 두고, 알파와 오메가가 되었는데, 카니발의 아침, 하루 아침에 인간 육체의 짐승화 견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조금씩 짐승의 속성을 집어넣고, 프랭키를 찔러넣고, 다시금 인간이 되는 시간을 체크하고, 기다리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입속의 혀와 같은 것이다. 안약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그것은 콘택트 렌즈도 마찬가지이다. 입속의 혀는 당연히 사탕을 만난다. 음식을 만나지만, 우리들의 마지막 지성소 같은 것은, 단 하나의 요소와 형태로서의 사탕을 만나는 것이다. 사탄은 여행할 수 없다. 사탄은 일할 수 없다. 파괴하고, 우상 숭배하고, 우상 숭배하고, 파괴하고 하는 것이다. 성경이 사탄에게 힘을 주었는지, 사탄을 무찔렀는지는 어떠한 대수학자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괴력난신의 힘과 크기는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원래 삼미터였다면, 삼미터일 수 있고, 원래 일미터였다면, 성장기 때 클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기도 지난 이미터의 사람이, 삼미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힘도 마찬가지이다. 하루하루 연습하고, 연마하고, 함께 연습하고, 헬스 클럽에서 도와주고 해서, 힘이 세지는 것이지, 한 달은 먹지 않은 뱅골만 호랑이 같다가, 엄청난 크기의 바벨을 번쩍 들 수는 없는 것이다. 행여 절대의 생명 공학이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있어서, 그런 사람이 가운데 한 사람 있다면, 그와 같은 성채 주변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지금의 영화는 그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끝까지 반복되어 있다. 처음에는 그것은, 우리들의 위로가 되어주었다. 전쟁은 우리에게 키를 제한하였다. 그래서 그와 같은 미제나 일제 영화를 보면서, 한국 사람들은 사회적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괴물이 되기 보다는, 태공조의 간섭에 의해서, 포유류 맹수가 되는 시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영국시처럼 만날 수 있다. 


공작, 에버튼 삼세, 

피리를 잘 불고, 관현악에 참가하여

런던에서 수 차례 연주회를 가졌었다. 

공부보다는 일하기를 좋아하고,

공부보다는 여자들의 섬세함이 좋았고,

공부보다는 늘 언제나 

좀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였다. 

함께 있으나, 혼자였고

독서하였으나 실험하였으며

철학적이었으나

도덕적으로 문맹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한국어가 나오면

집에 가서 온 몸을 씻고

도움을 받아 자기 몸을

채찍질하였다. 우리는 우연의 자식이며

우연으로 돌아간다. 


연습은 원리와 같고

공장은 사원과 같다. 

하나님은 찾을 수 없어도

사탄에게 돌 하나는 

던져야 하는 것이다. 


에일리언 어덥션

인덕션,

사당행을 지나는.....


에일리언


어덥션....









'일반민중문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나의 소설들을 생각해 보건데......  (0) 2019.04.30
영화 창궐(2018)의 슬픈 회오리 바람  (0) 2019.04.24
고성 슬픈 산불  (0) 2019.04.05
세계는 지금  (0) 2019.03.30
김주열 열사는  (0) 2019.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