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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내가 나의 소설들을 생각해 보건데......

by 마음대로다 2019. 4. 30.

내가 나의 소설들을 생각해 보건데...... 






글이라는 것은 기회가 주어질 때 쓰는 것이 좋다. 어떻게 새 컴퓨터를 장만했는데, 있던 자료를 옮기는데 애를 먹고 있다. 있던 자료라고 하면, 세 가지인데, 하나는 시와 소설 등의 글이고, 다른 하나는 포토샵이며, 다른 하나는 찍었던 사진들이다. 나는 소설을 별로 등한히 여겼었다. 그러니까 등한히 여겼었다는 뜻이다. 나는 반드시 철학책을 써야 했다. 철학책이 좋은 건물을 오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보장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지켜주는 마모루라고 한다면, 소설은 일종의 허난설헌처럼, 누군가의 글 같고, 거기에 올려진 눈들 같고 그런 것이었다. 우리가 감각을 활자로 옮긴 적이 없어서 그렇지, 옮기고 나면 금세 지루해지는 것이다. 사번타자의 감각이라고 해보자. 처음에는 그렇게 어렵다가, 사번타자라고 기회를 항상 잘 살리고 나면, 얼마나 무덤덤해지겠는가? 철학도 무덤덤하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맹렬하게 회전하는, 가르침의 구석이 있는 것이다. 없는 것은 위협과 같다. 그러나 철학은 존재를 가르치고, 사람들을 회전케 하고, 월미도에 있는 스카이 콩콩에 사람들을 태운 뒤에, 분출케 하는 것이다. 없는 것은 그렇지 않다. 없는 것은 사람들을 정말 어렵게 한다. 성경에 있는 가나안 땅이라든지,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는 것은, 철학적 존재에 가깝다. 내가 시크릿 가든을 좋아하는 것은 그 이유에서이다. 시크릿 가든은, 내가 좋아하는 앙드레 가뇽과 더불어, 한 장의 사진의 마지막에 이르러, 마지막에는 두 장도 될 수 있고, 열 장도 될 수 있으나, 마지막이 정말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한 장이 될 것인데, 수많은 아름다운 상형문자가 있었대도, 죽음에 이르러서는 한 장의 스핑크스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흐를 수 있는 음악적 파워는 분명 대단한 것인 것이다. 어떻게 인간은 죽을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은 평생 사랑하고, 평생 사탄과 싸워야 하는가? 나는 좋은 건물을 지나는데, 눈들이 날마다 테두리를 달리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왜냐하면 나는 기본적으로 수묵담채화가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신비하다 하였었다. 그것은 마치 에스에프처럼, 미국 영화 러브스토리 마지막에서도 드러났던 것이다. 우리는 팝송이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어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크리스마스적인 응집성, 혹은 계절적인 기억, 사랑의 제한된 명 수, 박명수가 아니라, 그리고 교육받은 사람의 세인트 카디널즈 같은 것이, 항상 재치가 넘치는 성탄 카드라는 말, 그런 것을 태평양 상에서도 거뜬히 담아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서구의 팝송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에는 끝이 없었다. 우리들의 영화도, 우리들의 소설도, 우리들의 민속도, 우리들의 홍콩 영화도, 그것과 시간적으로 대결하기도 하였고, 연합하기도 하였으며, 연합뉴스, 우리들의 대학도, 우리들의 천국도, 우리들의 본질적인 순환도 저마다의 기어나 태엽 같은 것으로서, 회전하고, 맞물리고 하였던 것이다. 항상 우리들의 말과 글들은 빠지는 것으로 있었다. 밤 깊은 중에 갤럭시 워치를 보면서, 검수원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그윽해지는데, 내가 돈이 많으면 하나씩 검수원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그 정도였다. 보통 기어라고도 하는데, 그것의 장점은 그렇게 다양하게, 그것의 이미지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세이코의 시계도, 혹은 카시오의 전자시계도, 우리의 특장점과 같은 체력, 기억력, 감화력, 몇 개의 조석변개와도 같은 교과서 속의 소설들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일본의 시계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손목 차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우리들의 문자적 반응에 호응하고, 지시체가 되고, 생각을 이동시키는 훌륭한 사물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문단을 생각할 때, 그들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이었다. 내가 얼마나 문단에 오르고 싶었는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것은 강박과도 같다. 그것만은 아니다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강박과도 같았다. 그러나 강박 강박 중간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것은 생산성인 것이다. 강박도 없는데, 무슨 생산성이 보장되겠는가? 


나는 갤럭시가 되었다. 그것을 요즘에는 보지 못했으나, 이번에 컴퓨터를 바꾸고, 인터넷에서 8k 화질의 그림을 보자니까, 뭔가 익숙한 것이었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하다가 내가,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일까? 때로는 미안하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시크릿 가든, 어렵고, 정확히 나의 단점을, 그리고 정확히 문단의 장점을 설명해야 하는데, 피곤하고, 그런 것이다. 피라미드가 우리들의 전쟁 이후에, 세계 경제와 문화, 문학과 영화 같은 것들의 상징이 되고자 하였었다. 그것이 정당한 교육을 위해 그랬다면, 우리는 모른 척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삼척 동자도,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내. 이상한 것을 치키고, 좋은 것은 안 치킨이 되는 것이었다. 굽네도 마찬가지이다. 굽네는 신학을 향해 있는, 문학을 뜻한다. 우리가 신문학이라는 것을 만난 적이 없으나, 굽네치킨이라는 말은,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지날 때, 우리들의 의식에 회전을 일으키는 바퀴는 되는 것이었다. 더더욱 군부대를 지나고, 치킨이 먹고 싶을 때는, 아무런 뜻도 없이 이렇게도 효과적인 것이었다. 웃음도 나오고. 시크릿 가든은 오래가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앙드레 가뇽도 마찬가지이다. 앙드레 가뇽은 오래가지 못한다. 하지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하는 노래 가사가, 어느 맥락에서는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것처럼, 앙드레 가뇽이 없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언젠가 가뇽의 음악은 신고전주의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고전주의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한데, 다만 그와 같은 레토릭을 사용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나의 소설 산행을 보면, 이상하게도 영화 외출에서 비슷한 포맷으로 연출된, 외출은 다른 소설인데, 매우 안타까운 절박함이 시간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확실히, 인간에게는 탑의 수직적인 차원이 있는 것이다. 관촉사의 부처님 입상이 이상한 것은, 탑을 어떻게 인간적으로 묘사하고자 하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서울대 대학원 입학 준비 기간에, 전철역 근처의 자취방에서 쓴 글인데, 그렇게 나에게 아름답고, 나의 정신이 그대로 묘사되고, 세상 모든 여자들을 얼려죽이는 일이 되는가, 다만 글일 뿐인데, 그런 글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만일 산행을 문학의 오리엔테이션, 그러니까 적어도 신현균 문학의 입문으로 삼는 것으로 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북경 오리고기만 먹고 일 년을 보내야 할 지도 모른다. 나는 성경의 욥기에서, 하나의 문맥을 따왔고, 인용하였고, 그것을 중심으로 글을 썼는데, 지금 보면 그것이 그렇게, 내가 보내고 싶은 홈런 볼을, 홈런 볼을 쳐서, 원하는 방향으로, 멀리에서 찾아온 사람에게 글러브 캐치하게 해줄 수 있는가 싶은 것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헤겔리언이었던지, 처음부터 헤겔리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해는 잡을 수 없으나, 손가락을 대면, 따뜻하지 않는가? 공부한 것이 하나도 달아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건물이 되고, 사람들을 앉게 하고, 빛을 달고, 다음에는 이런저런 관을 설치하게 한다. 그것은 감각이다. 영문학적 감각은, 진부하지만, 아름답고, 이념적이며, 도시적인 풍모를 마침내 갖게 되었다. 기독교적인 풍모와도 오버랩이 되고, 제국주의와는 영원히 미스테리가 되었다. 




......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겠다. 나는 어떻게 하다가 세상을 바꾼 사람이 되었다......





관점에 따라서는, 원성을 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