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을 안 보고 쓰는 영화평....
나는 친구집이 그렇게 좋았다. 그렇게 보면 나는 친구집 기생충과 같았다. 그렇다고 항상 친구집에 가자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자고 하면, 오라고 하면, 그때부터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는 불가능해졌다. 여자친구라고 하는 무한수에 이르러, 다만 다녀오는 방문에 그치지 않고, 둘은 존재의 등급이 떨어진 채로, 촉석루에서 빠져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존재의 등급이 자라는 것이 아닌가? 우리 한국어가 개구리를 가리켜, 양서류라고 필사적인 네이밍을 했던 것은, 개구리의 모든 속성이 그렇게도 어린아이의 순박한 생명에 잘 들어맞아서일 것이다. 부모님의 아이들에 대한 절대적이며, 절망적이고, 종말론적인 소망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대학에 가서,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사군자에 대나무가 있어서, 그렇게 대나무 그림을 많이 그리고, 방에다가도 걸고, 문에다가도 붙였던 것은, 그것이 책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론이라고 하면, 철학적 용어로서, 그것이 그렇게도 대나무의 죽염 그림의 검은 색을 닮았다. 책을 많이 읽고, 저녁 늦게 죽염 치약을 빨고, 양치한 다음에, 잠에 든다 하면 우리는 죽어도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두웠고,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도 회의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님이 된다고 해도, 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대대로, 그와 같은 항우의 포위 같은, 이리 가도 적이고, 저리 가도 적인, 그런 존재인 것이다. 아주 부유한 기독교 전통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학 교육을 잘 받고, 신학대학을 그것의 증명서를 받는 것으로다가 다니고서는, 설교를 하여도, 그렇게 아카데믹하고, 예화가 풍부하며, 아프거나, 기복적인 말 절대 없이 하는 사람을 우리가 만나기란 좀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가인을 내보내고, 아벨을 살리신 다음에,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처럼, 알료사를 중심으로 정신을 잇게끔 하였을 것이다. 늘 항상 아프고, 돈이 없고, 신학생이 배를 타고 호수에 나가면, 다음의 일을 체홉처럼, 헤아리지를 못하는 것이다. 자연적인 기도의 문장이, 성경의 오랜 고급스럽고, 그렇게 막대하며 거룩한 기도의 문장과 항상 상충하여도, 영험하여서, 듣는 이도 그와 같은 생멸문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배경과 중첩, 그것의 연장은, 봉준호의 필모그라피와 같아서, 좀체 나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 목사들이 교회 증축을 시도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증축하고만 나면, 마치 왕의 아이를 낳은 후궁처럼 세상 만족하게 되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문제라면, 세상의 기생충들이 문제인 것이고, 만일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목사의 기생충 구멍에 그렇게 햇볕이 드는 것이다. 일을 해도 축축하고, 놀기만 해도 축축하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생축이라고 놀리는데, 아무래도 일이 없는 사람들이 밀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이 완전히 놀 수만은 없어서, 그리고 능력이 되어서, 힘껏 일하지 않고 공부만 하여도, 노는 공부, 공부의 노는 것, 그것의 희미해지지 않는 의식, 아카테미컬 코우잘러티, 그것이 실은 차원의 구멍이 되어서, 노동자들에게 햇볕이 되고, 말문이 되고, 하는 것인 줄을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이다. 놀다가 일하려고 하면 그렇게 힘들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험만큼 값진 것이 없다. 온 몸이 화강암이나 현무암처럼, 부풀거나, 붙어 있는 것 같으나, 어떻게든 일하려고 하다 보면, 자기의 정신과 육체가 옵티무스 프라임처럼 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 나이 드신 목사님들은 직업병을 갖고 있고, 기본적으로 존재의 변호사로서의 레토릭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돌파하려는 무수한 목사님들이 계시는데, 그래서 관점에 따라서는 기성 교회의 목사님인 것이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대단히 혁명적인 목사님들이신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백번 김구. 그러니까 백번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단 하나의 관념을 가지려고 하면, 기존의 것들이 이상하게 생각나지 않는 물리적 경험을, 우리의 뇌에서 발견하여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뇌는, 우리의 말은, 우리의 말의 능력은, 서로가 서로에게 일종의 뉴우런처럼, 기가 막힌 유비요, 거울처럼, 기생충처럼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독의 영화들이, 감동적인 것은, 그의 관념이 남다른 것이고, 영화들이 서로 엇비슷한 것은, 그가 그의 가난한 중에 기생충 같은 삶을 살기 때문인 것이다.
모든 영화는 모두 비슷하다. 옛날 영화를 봐도, 다 비슷하고, 요즘 영화를 봐도, 다 비슷하다. 기생충과 기생충이 손을 잡고, 함께 위를 오르는지, 아니면 다들 이름의 사회적 가치처럼 아래로 향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세계 영화제들의 그랑프리 수상작들을 보면, 다들 다르고, 그러나 앙드레 가뇽과 함께 하는, 영화를 보지 않고 쓰는 영화평에 익숙해지고 나면, 하나 같이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다들 훌륭하고, 섬세하며, 인간적이고, 빛깔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감독은 시대를 통찰하고, 시선이 있고, 여배우는 고생을 많이 한다. 남자들이 고생하는 것은 별로 미학적이지 않다. 여자들이 속옷의 종류가 많고, 머리 모양이 다양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단발령이 있었던 것도, 그렇게 우주적으로다가 중첩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다들, 광개토대왕비 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북두신권 애니 시리즈를, 우주론적이며, 에일리언적인, 그리고 고대사학적이며, 청소년에 직접적인 의미를 따져서, 아무런 이유 없이 베니스나 베를린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줄 수도 없는 것인 것이다. 영화는 규격이 있고, 처음에 시작했다가, 끝에 끝이 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만한 눈을 갖고 있는 것이고, 눈을 붙였다가, 떼내는 것이다. 그것의 시간이 그렇게 단단하고, 존재를 잘 맞추는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배워도, 예수님이 나오는 영화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고, 음악을 사랑해도, 아마데우스 영화를 도무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노벨 문학상을 때로는 밥 딜런이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존재는 규격이기도 하고, 형식이기도 하며, 규격이 없는 것이기도 하고, 기생충이기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면, 단 한 번도 기생충으로 끌려 떨어진 적이 없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씬풀하거나 크리미널한 것이지, 패러시틱한 것은 아닌 것이다. 다만 서구의 문명이 철학적으로 분명하고, 누군가 음악을 잘하다가, 철학도 잘하는 길을 갔는데, 그것이 그만 기록에 남지 않은 것 같은 시공간이 분명하고, 그들을 둘러싼 우리들이 또한 패러시틱한 것이 아닌 것이다. 에스엔엘 같은 것을 봐도, 우리가 우리들의 유명인을 흉내낼 때, 그렇게 재밌고, 그렇다. 그런데 미국 잘 모르는 배우들이 그들의 유명인을 흉내낼 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만 보면, 분명 같은 정도로 재밌거나, 같은 정도로 호기심을 유발하여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렇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생충들much parasitic royalties이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권력이 없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어도, 그렇게 존재와 김치를 향유할 수 있는데, 수십년 동안, 셀 수 없는 펀치를 주고 받은 서양은 지금, 그와 같은 경우, 뭐에 쓰는지 모를 대왕오징어가 해변에 죽어서 드러난 것 같은 기분인 것이다.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는 선이 있는 것이다. 내가 언젠가, 한국 천주교와 세계 천주교는 다르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마땅한 덧붙이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파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세계 천주교는 죽은 대왕오징어와 같이 되었는가?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특별한 전쟁 같은 것을 했는가? 이야기의 끝물에 이르러, 그것을 덧붙일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곡성을 찍고 죽고자 하였다. 그러니까 도저히 밝은 햇빛을 보는 기생충이 될 수가 없다고 했다. 감독과 일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작가가 감독이 되고, 감독이 촬영감독이 되고, 촬영감독이, 음향, 조명, 이런저런 엔지니어들이 되고, 배우들이 되고, 아역 배우들이 되고 하는 것이다. 내가 곡성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 모든 것들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있음을 볼 때, 없음을 배경으로 해서 보는, 작가주의에서도 착안할 수 있으나, 기생충을 배경으로 해서 볼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있음이 있고, 기생충이 있는 것이다. 학교를 다닐 때, 자기는 노는 것의 기생충이다고 고백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귀엽고, 선명하며, 화사하고, 그래도 공부를 잃지 않기를 응원하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학교다닐 때의 존재를 잃고 나면, 모두가 곡성에 모여 살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공포 영화를 찍는 것일까? 칸 영화제 같은 곳에 가기 위해서가 아닌가? 정확히 그 연결된 기생충선을, 러시아 왕 이름, 짜르, 자를 수가 없다. 서양의 자유가 지금 침몰 일보직전인 것은, 사람들의 공포영화적인 기생충선을, 러시아 왕 이름, 짜르, 모짜렐라, 자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구가 파괴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박일도 영화가 나왔다. 그리고 하루 쉬지도 않고, 프리스트라는 영화가 나왔다. 사람들은 영화 검은 사제들과 비슷하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미국 영화와 비슷하고, 오씨엔과 티비엔의 드라마는, 그 알 수 없는 힘으로써, 공중파를 공중에서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그에 관한 영화평은 지금까지 어디에서고 만나볼 수 없다. 대체 그와 같은 힘이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나왔으며, 현균씨가 말하는 한국 천주교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우리는 굉장히 궁금한 것이다. 만일 내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써, 내가 그 둘을 집필하였다면, 사람들은 전세계 영화의 탱크 전쟁을 관람할 수 있을 것이나, 당연히 다른 사람인 것을 뻔히 아니까 미국 사람들은 초조해진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도, 그리고 폴란드 사람들도 두렵고 떨리는 일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말로만 듣던 거북선을 실제 사진으로 본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박일도 드라마의 인격들은, 슬프고, 기생충으로 나아가 존재를 드러낸다. 사람이 어째서 공포영화를 찍는가? 하는 것의 문제를 처음으로, 소크라테스, 그 말이 바로 처음으로 하는 것인데, 드러낸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나의 존재, 그것의 미니시리즈적인 기생충이다고 처음에는 생각했었다. 나도 우쭐대면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새끼들이 또 잔인한 드라마를 찍는가 했더니만, 그렇지 않았고, 내가 다시금 양서류가 되어서, 슬픔의 큰 강을 지켜보게끔 하는 것 같았다. 프리스트도 그랬고, 깔끔하기로는 알함부라처럼, 포근하고, 레이스가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영화제가 있고, 기생충이 아니라면, 해당 시간에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세계에서 모두 골라, 추려서, 그랑프리를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세계에서는 그랬다. 이미 그들은, 상이 넘친다. 그만 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이 저절로 공중으로 날아서, 영화 그레이트 월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이몽이, 칸 영화제 전선에 걸쳐, 그것을 막판이랄 수 있다면, 겨우 공중파의 봉긋함을 만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 한국 천주교 드라마에 대한, 드라마 상 같은 느낌이 있다. 상은 피와 같다. 그렇다면, 원령공주의 오에스티가 우리들의 얼굴에서 시간을 만나고 있는 것인가. 이 정도로 떨어져 있으면, 상품 선전 같지 않은....
'일반민중문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아 케이 세븐과 스즈키 카타나 (0) | 2019.06.12 |
---|---|
일본 드라마에는 금기가 있다. (0) | 2019.06.01 |
내 옛 소설 여름 그늘에 대한 향수 (0) | 2019.05.18 |
우리는 지금 심각한 이몽 후유증에 사로잡혀 있다. (0) | 2019.05.14 |
내가 나의 소설들을 생각해 보건데...... (0) | 2019.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