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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반복되는 시간의 전진의 시간에 관하여

by 마음대로다 2019. 7. 17.

반복되는 시간의 

전진의 시간에 관하여






내가 언제 자칫하면 삼국사기만 남을 수 있다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모르겠다고 했었다. 이렇게 경기에서 적시타만 남기고, 집에 간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로부터 어크로스 유니벌스, 갤럭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란 어크로스 더 스트릿, 그러니까 거리를 지나는 시간만큼, 캄차카 반도는 도는 것이다. 어느 연예인들이 드디어 캄차카 반도에서, 그곳 어느 농부와 함께 물고기를 잡았던 것이 생각난다. 학교를 다녀도, 시간이 멈추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시간이 빠르고, 경마장에서 에프원 경기장을 가는 길이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또한 시간이 멈추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들의 학교가 슬프고, 내 큰 형이 내가 학교도 가기 전에 죽었던 일이 생각나고 그렇다. 내가 거기서 지금의 문체, 필체, 전세계를 쥐고 흔드는 아라한의 힘을 얻었던 것일까? 검은 흙을 받았던 것일까? 흙은 글이 아니다. 다만 검은 색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우리들의 시작을 이겨낼 수가 없다. 버릴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들의 미약한 시작이 있고, 약을 먹었는지, 아니면 안 먹고 감기를 이겨냈는지, 그래서 그 맨 처음의 부활절을 거쳐, 친구를 만나러 갔는지, 아니면 음악을 틀고, 책을 읽었는지, 아니면 티비를 켜고 개그맨들이 물 위를 걷고 있는 것을 재밌게 보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이 하나가 되고, 본질이 다시금 익숙한 것이 되면, 그 맨 처음의 부자가 낙원추방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양자강 이모작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가? 김병만족도 생존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는 모든 것의 비밀이 있고, 모든 것의 비밀이 과연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가 되는지, 아니면 우리가 보는 그대로, 따로 떨어져 엄청 기간이나 거리만큼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음악을 틀고, 책을 읽는 현자가 우리 사는 세상 어딘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드라마 느낌과도 같다. 세상에, 세 사람의 남자가 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절대의 인격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약에서, 혹은 아픔에서 깨어 일어날 때, 성경 속의 소녀처럼, 우리는 너무 세상 덕에 힘들어 하지 않아야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덕을 기리고, 생각하는, 그와 같은 지정생존자와 같은 표상은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학교에 있으면, 기숙사에 있으면, 원래는 대입 기숙학원의 기숙사가 완벽한 것이겠지만, 대학교 기숙사에 있으면, 저녁에 아팠다가, 친구가 건넨 감기약을 먹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감기에서 나은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때는 헤겔이 노려보는 것 같고, 철학강요를, 오히려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후퇴일 것이기 때문에, 실제 전장에서의, 자기에게 최선과, 자기의 현상학적 최선에서 전진하고 돌격하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대학이 있고, 대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숙사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경쟁의 친구가 있다면 더더욱 드라마는 완성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성과의 가능성에서 사는 것 같지만, 동성끼리의 경쟁도 있는 것이다. 보통의 개발도상국가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은, 그와 같은 공식에 충실하고, 동시에 그와 같은 공식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 있어서인 것이다. 나는 성문종합영어를 방학 동안에 누군가 한번 보았다는 말을 그렇게 존경하고 어려워했다. 다만 입시위주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선비는, 그와 같은 현실위주의 문제집에서도, 충분히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실에서도 대단한 것이고, 숨겨진 이상에서도 대단한 것인 것이다. 대개의 여름 숲은 어둡고, 깊은 어둠과, 여름의 폭력적인 햇빛은, 우리들의 육체를 가감없이 다그쳤었다. 나도 한번 방중에 일독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렇게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보았고, 그래서 대충 넘어갔던 것이 많은데, 그것의 인비져블 플라이트 혹은 비히클이 나중에는 방중에 읽는 책을 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처음과 같았고, 나중, 혹은 모든 시간의 끝과 같았다. 대학을 다닐 때는, 눈에 보이는 거짓된 가상의 공간을, 숱한 로고스들과의 씨름을 통해서, 다보탑을 만드는 것이 김대승인 것이다. 본과 전공 과목이라는 정공법, 혹은 훈구의 세력도 있지만, 사적인 숲 안에서, 가끔은 먹을 것 걱정하면서, 두꺼운 책으로 나를 때리고, 매질 그 자체를 때리고, 혹은 남도 가끔 때리고 하는 것으로, 그런 보다 진하고 복잡한 사림의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비교회적 학교 위주의 신학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그와 같은 시간의 자기 감각 혹은 의식이, 결코 신학적 본질에 위배되거나, 질적으로 못하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의 배신의 빛깔이, 때로는 가슴 깊이 괴롭거나,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표현처럼, 그나마 기독교에서 설교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훈련이 필요하고, 결고 머릿 속에서 가능한 것들이 실제하지 않는 것인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내가 말하는 학교, 내가 사랑하는 학교, 거기에서 일본식 표현으로 기라성과 같은 교수님들의 설교 한번이 결코 후퇴하지 않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또 듣는다는 것은, 화랑의 세속오계 중에 하나, 임전무퇴의 것처럼, 여간 후퇴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선발되어, 채플 시간에 설교하는 것이, 어느 것은 승리하는 기분이 있었고, 어느 것은 마냥 이도저도 아닌 것으로 있었었다. 그래도 채플 찬송을 힘있게 부르고는, 거기서부터 모든 메뉴의 오징어 다리 하나로 내려가는 것이, 세상 그 무엇과도 구별되는 것으로 있었던 것이다. 모든 잎들이 떨어지고 나면,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하나님의 핏줄만 남는다. 그리고 거짓처럼, 혹은 현상처럼, 그것 하나하나의 우주처럼, 잎이 다시금 무성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줄기를 성기라고 생각하지, 꽃이나 잎을 성기라고 생각하지 않지 않는가? 우리가 신학을 성기라고 생각하지, 문학을 성기라고 생각하지 않지 않은가? 만일 축구장이나, 야구장이 그와 같은 한 잎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신학을 하다 보면 이와 같은 의식이 칼날처럼, 빛나고, 그런 내 자신에게 두려움이 생긴다. 문학하는 사람들이 약간 세상 편해보이는 것은, 그들의 언어가 생산되어 생활하는, 방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훈구의 의식이 있고, 사람으로서 파생되어 나아가는 것은, 일종의 자연신학적인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것이 아니고, 그것에도 반복이 있고, 반복이 문장으로 우리에게 이미 던져져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는 부르즈 칼리파일 수 있다. 그들이 신학적 케리그마를 알지 못하는데, 그와 같은 표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의미가 어떻게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신학적 케리그마는 삼손의 당나귀 턱뼈처럼 되어 있다. 어떻게 생긴 것인지, 연세대학교에서 최루탄 시위 축제를 우리가, 죽기 살기로 해야 아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한신대 운동권에게 실망한 것은, 그렇게 아파서 잠에서 깨어 일어난 뒤에, 놀기 좋아하고, 술마시기 좋아했다는 것이다. 내가 죽기살기로 책을 읽은 것도, 순전 그들에 대한 운동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늘 타임머신으로 들어갔고, 타임머신에서 나왔다. 생산자, 혹은 소유자라는 것은, 결국에는 모든 것의 관계가 다른 사람과 하나도 차이가 없을 때 발생하는 것일 것이다. 서양 제국주의의 시작이 의심스러운 것은, 그들이 신학적 후추도 없는 상태에서, 이천년 신학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커피도 그렇다. 차도, 커피도, 초콜렛도, 생강도, 마늘도, 김치도, 깍뚜기도, 느므끼뜨파, 없는 채로 다만 반복되어서는 결코 오를 수 없는 타임머신을 구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정생존자가 슬프고, 나의 서강대학교도 슬프고 그렇다. 내가 한신대학교를 상정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이문열이 신학과 과목을 한학기 동안 여러 개 청강하였다는 것으로 에피소드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문열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소설적 가능성이 아닌가? 기존의, 그러니까 이전에 썼던 것은, 그것의 증거로만, 혹은 증명서로만 기능을 할 것이다. 후퇴하지 않고, 거대한 탑에 들어가, 모든 문명의 필연적인 위선의 태양을 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태양과 함께 학교 수업을 듣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서강대학교에서, 한 학기 대학원 수업을 듣고, 학과 조교를 하고, 이런저런 세미나에 출석하였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그와 같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기계적인 의지가, 사나운 지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학교 문법에 있었던 것일 것이다. 


이상하게 독일에는 민주적인 시위의 풍경이 별로 없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있고, 홍콩에는 홍콩의 것이 있는데, 독일에서는 그와 같은, 역사적인, 혁명의 사진이 없는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 아래의 학생들은, 결국에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 세계로서의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도그마틱한 문답에 깊이 시달려야 했다. 오랫동안 영국은, 한국의 편에 서다가,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의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르지 않는가? 사람들은 성경을 오래도록 모르고 지낼 수도 있었고, 완독하여, 열번, 오십번, 백번을 완독하여 지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헤브라이즘과 그리스로마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시황제의 경전이냐 아니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나라이냐 하는 것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듀얼리즘은 오래가는 것이지만, 시황제의 경전이라는 말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어서, 삼국사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것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다만 직접적으로 읽었을 때는, 소인국에 도달한 걸리버처럼 자기가 여겨졌을 것이다. 대체 누가 번역을 한 것이지? 하는, 벵글벵글 도는 것이 있는, 에어 프라이어 같은 타임머신. 그러나 고구려본기에서, 무참하게 그리스로마가 당한 뒤에는, 두려움이 생기게 된 것일 것이다. 성경을 읽고, 그들은 늘 언제나, 악어족이 되었었다. 이름적인 악어족이거나, 에피소드적인 악어족이 되었었다. 케리그마가 가장 낫다는 불트만의 주장도, 매우 현명한 정치적이겠지만, 여기에서 그만 예수님을 은전 몇 냥에 팔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왕이 필요하고, 왕권이 필요한 것인가? 민중에게도 그러하고, 학자들에게도 그러하며, 왕에게도 그러한 것인가? 다만 생존의 자지 때문인가? 아니면 지성과 연속의 생계 기본적인 자금성 때문인가? 왕이 미쳐 날뛰면, 처음에는 자기 코에서 코피가 난 것인가 했던 것이다. 세상에 그런 것들을 기록할 만한 여유가, 파푸아 뉴우기니에도 없는 것이다. 만자로에도, 세렝게티, 이디아민, 킬링 필드에도 없는 것이다. 왕권은 시계와도 같고, 존재는 시간과도 같은 것이다. 개인이 만행을 저지르면, 경찰이 잡아가나, 왕이 그런 짓을 하면, 때로는 누군가의 무덤으로 덮힐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옳은 것도 좋아하지만, 그와 같은 고딕 스타일의 이야기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베르크는 그렇게, 쫓기는 왕자가 되어, 성균관까지 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이든 학생들도 많이 보았고, 그들 세계에서는, 스무살이 넘어 책을 읽으면, 좀비가 된다고 해서, 성적인 이야기는 일부러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들?로 안 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저녁에는 땡보기도 하였는데, 막걸리도 마시고, 매일같이 지기만 하다가, 절대 봐주지 않아서, 어느 날은 구땡을 잡고는, 싹쓸이를 하였던 것이다. 베르크는 자기를 봐준 것이냐며, 절대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느냐 했더니, 분명 그렇다고 했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인사를 나누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때 봐준 것이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어느새 후백제, 혹은 후고구려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독일로 돌아가서, 그가 한 일은, 민중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당연히 의식의 수준이 귀족들을 상회하게 되자, 탄압이 들어왔고, 이미 사람들과 단단하게 동맹한 베르크는 자기 이름을 구땡 베르크라고 하고는 영원한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