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째서 사랑에 실패하는가?
목사가 사랑에 실패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삶이 두 개 있는 것처럼, 낭비하려고 노력하고, 낭비하고, 때로는 열심인데도, 결과적으로는 낭비하고 하는 것이다. 목적이 있는 것도 범주이고, 목적이 없는 것도, 목적이 없는 것으로서의 범주인 것이다. 사랑이 위대한 것은, 사랑으로 인해서, 입술이 두꺼워지고, 눈이 커지고, 가슴이 커지고, 여자도 가끔은 무리해서 하이힐을 신는 이유는, 목적이 있는 것과, 목적이 없는 것이 서로 일치를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독서를 그렇게 낭비스럽게 했다고 치자. 동사서독. 얼마나 남자가, 여자가 지적으로 변화하겠는가? 그러나 책만 사고, 책만 읽고, 아무런 의미도 지어입지 못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몸도 마음도, 차가워지고, 힘들어지고, 우리는 율리시스의 시선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국문학과가, 영문학과를 지날 때, 국문학과가 철학과를 지날 때, 국문학과와 영문학과, 그리고 철학과가 신학과를 지날 때, 우리가 꿀꽈배기, 버터링, 감자칩 과자를 모아서, 하니버터칩이라고 진열하고, 좋아하는 것처럼, 그것의 바라보는 위치라는 것은 엄청난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을, 죽을 것처럼, 방방곡곡 잊을만 하면 설치되어 있는 카페를 좋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결국에는 우리들의 스토리가 사로잡히는 것을 운명처럼 아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늘 가는 길에, 실패도 함께 간다고, 우리는 우리들의 대학 전쟁에서, 소규모, 대규모, 학도병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흥분하는 이유는, 목적이 있는 삶과, 없는 삶이 이상적으로 들어맞은 것 같기 때문인 것이다. 취직을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유열의 음악앨범처럼, 매 고비마다, 이상이 들어맞는 것이다. 우리들의 이상은, 그다지 훌륭한 문장이나, 이야기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이상이라는 지명이나 인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즐거운 사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학생에게는, 중이병에 걸려, 날개를 읽을 만한 것인 것이다. 그때는 읽을 수 없다. 학교에서 밤낮으로 달달 볶고, 지지고 볶고, 때리고 엎드려 뻗쳐 하니까, 황태 덕장의 황태들처럼, 황태자가 되어, 언어능력이 발달하는 것이지, 자연적인 조건으로 놓으면, 우리는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 읽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째서 읽을 수 있는 것인가? 어째서 모국어는 그나마 쉽고, 언덕은 세 개 정도 거뜬히 넘고, 영어는 언저리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래서 영어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영어를 통해서, 우리는 모국어가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해야 하는 것이다. 모국어는 한국어가 아니다. 모국어는 말 그대로, 세상 모든 국가의 부국어와 모국어를 뜻한다. 대학에 밀어 넣고, 옛날 안내양이, 마치 그와 같은 의미에서는 살아있는 것처럼, 울며 겨자먹기로, 그와 같은 아름다운 레토릭, 아이들을 집어넣어, 대학에 도달하고, 우리는 처음으로, 음악적인 존재를 만나는 것이다. 나는 주로 이야기를 하는 타입이었다. 그것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가 그와 같은 몇 마디를 거드는 것을 경험할 때는, 삼손의 연자맷돌을 어떤 아이가 함께 당겨주는 것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그렇게 성적이다. 어쩌면 모든 것이 그렇게 성적일 수가 없다. 항상 성적이고, 항상 성적표가 따라다닌다. 공부를 안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섹스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세상 어딘가에, 무뇌아의 부모 아래서, 유뇌아의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있어, 그와 같은 레전드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상상조차 어려운 불경이 우리의 존재를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하는 것인가? 섹스가 그렇게, 공즉시색 같다. 사랑이 진정일 때는, 그리고 같은 과에서 만났을 때는, 제과제빵학과에서 만난 것이라고 하면, 서로 돕고, 서로 치대고, 서로 굽고, 서로 오븐을 바라보고, 향기 맞고, 서로 손님들을 맞이할 때는, 그렇게 지혜가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것이다. 국문학과도 마찬가지이다. 항상 이상한 사람들을 찾아간다. 이광수부터가 이상했다. 글은 한없이 단정한데, 그래서 전기와 문장의 실재가 다르다는 각성이, 그러나 문장력이 없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졸업 때까지도 모르는 사실이 되는 것이다. 내가 국문과를 다니면, 무정만 무정만, 유정만 유정만 그렇게 보았을 것이다. 그것도 상당한 체격이다. 하지만 항상 생각의 기형적인 이완용을 찾아간다. 걷고, 보고, 생각하고, 앉고, 함께 커피마시는 우리들의 생활세계 현상학을 따르지 않고, 심해 어류가 되고, 누군가 방구를 끼고, 그것으로 사각형을 만들어서, 어떤 권력에 제출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김고은이 그렇게 말한다. 철학책을 읽지 않을래? 국문학과의 어법은, 늘 언제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 논법처럼 죽는다. 다만 고급한 독자인 것이다. 율리시스의 시선 음악을 듣다 보면, 대체 그것을 언제 보았고, 언제 눈물 흘리면서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터넷의 한줄 비평에 이영애가 글을 남기고, 다시 또 보고싶다고 한 것이 그렇게 재밌다 싶다. 이광수가 절정이라면, 너무 슬픈 것이 아닌가? 안경은 율리시스의 작가처럼 쓴 사람이. 그리고 번역본을 읽고자 하면, 남는 것은 선망 뿐인 것이다. 국문과와 영문과가 만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삼일 동안을 모텔에서 나오지 않고, 평생의 추억을 쌓는 것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정지용의 황소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코, 우리들의 육체는, 문자에 영원히 호의적이고, 푸르고 아름다운 희망에 호락호락하지 않다. 다만 문자는 바로 그곳에 과거로부터의 통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있을 뿐인 것이다. 어딘가에서 들은 바 있는, 성기중심주의라는 것이 그렇게, 슬프고, 답답하고, 지혜는 사실이나, 좀처럼 우리들의 아름다운 현상학에 도달하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직장은 우리들의 어린 육체가, 안내양의 밀어주는 대학에 도달하여, 겨우 몇 년 정신을 꿈꾸다가, 맞이하는 차사고와 같은 것인 것이다. 사고를 당하면, 병원에서만 오가야 하고, 침대에서만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남자도, 여자도, 학교에서 배우던 이광수 말의 무게에 발이 무겁다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가정 교사처럼 몇 마디 거들어주던 사람이 그렇게 기억이 나는 것이다. 공대생들은 똑똑한 선배들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철학과나 문학과, 영문학과 학생들은, 여자들이 그렇게 인사이트를 가질 확률이 높은 것이다. 미대에서도, 음대에서, 점점 더 남자들은 깡패가 되어 간다. 씨씨는 원래 캠퍼스 커플인데, 남자 혼자의 엔진 크기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 실패한다. 국가의 경비가 아니라, 사랑의 경비에 필요한 것이면, 모든 장비를 완벽하게 준비한 다음에, 여자들을 군대에 보내야, 그것이 도리어 문제풀이의 정석이 되는 것이다. 씨씨가 높았던 남자들이, 군대에서 더더욱 엔진 크기가 피자 알볼로만 해지는 것이다.
여자들은 발표에서도 바람이 빠지게 되고, 사랑이란, 남자의 영혼의 바람을, 여자에게 조금 나누어주는 것으로써, 앞으로의 서울은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환상처럼, 가끔은, 그들의 영혼이 절정일 때를 기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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