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나비효과라는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십일세기 유리성 안에서, 나비효과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에 있어, 부분은 정확하나, 전체가 막연하기 때문인 것이다. 때로는 전체는 분명하나, 부분이 매우 흐릿하고 모호하기 때문인 것이다. 전체와 부분을 순식간에 보려고 하면, 때로는 아무 것도 안 보이기도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말의 부분이 어느 정도 확보가 되었을 때, 그것을 뒷바침해주는 다른 말들이 없는 경우, 그와 같은 파발마는 하나로만 질주하다가 문경을 지나, 충청도 어딘가에서, 그 숲 깊은 곳에서, 지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달을 보는 것은, 다만 거꾸로 가는 것은 막아보자는 것일 것이다. 나비효과는 부분은 옳으나, 전체가 불분명하고, 전체적인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나, 부분에 걸쳐,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가 제시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나비효과는 영화적인 기법으로는 최고이고, 그것을 놓칠 헐리웃 영화가 아닌 것이다. 보지는 않았다. 평행이론은 보았다. 그리고 매우 흡족하였다. 그런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비효과는 보지 않았다. 불쌍한 미국 청년들이 나와서, 나비효과에 시달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두고 우리가 현상학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부르면 안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는 것이다. 미국 청년들이 고생을 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오영석 국방부 장관이 알 수 없는 권력 관계 안에서, 꼭두각시가 되었다가, 코스모 폴리탄으로서의 여러 생명의 운명을 달리하는 것이, 불쌍한 미국 청년들 모두를 대신할 수 있는 지가 관심이 가는 것이다. 어느 정도 대신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탄은 그렇게 얼굴이 필요하다. 그것이 반드시 그와 같은 형이상학을 초래하는지는, 오직 철학자만 아는 것일 것이다. 악어족들은 대게 나비족들이다. 그런 효과족들이다. 그래서 실은, 육체를 갖고, 한반도를 침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숱한 나비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나씩 효과부리다가 보면, 스스로 흥분하게 되는 것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무대인가? 그것을 인도어로 말하면, 뭄바이? 삶이란 나눔인가? 사람들은 뭄바이, 숱한 지옥적인 나비효과 안에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대선후보인지, 무엇이 악인지, 구약 신약 할 때 약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나비족들은 일상어가 따로 있고, 급격하게 부분적인 나비 효과 상호적인 환경들이 따로 있고 그러하다. 우리들도 그렇다. 멀쩡하게 살아있고, 사랑도 하고, 연애도 하고, 편지도 쓰고, 기차도 타고, 전철도 타고, 믹스견도 보고, 일본 영화도 보고 하지만, 어떤 파티큘러, 그런 드라큘라 영화가 나타나면 평 하나 달지 못하고, 나비 효과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일본 사람들을 우리가 상대하면서, 그리고 그런 특정한 일본 사람들을 같은 일본 사람들이 보면서 경험하는 것은, 매우 일상 생활 세계의 현상학적인, 그런 매우 내추럴한 고전주의인 것이다. 누군가 현상학도 하고, 해석학도 한다고 하면, 여자가, 그것도 대학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열 명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자는 똑똑하기가 어렵다. 똑똑하기 위해 기를 쓰다 보면, 여자들도, 그것의 톤이 아니라, 남자처럼 되고 만다. 똑똑하다 보면, 같은 옷이 더 이상 같은 옷으로 보이지 않고, 그것의 패턴이 보이고, 자주 입다가 보면, 물이 빠지는 것이 보이며, 단정하고, 깨끗한 것이 보이고 하는 것이다. 나비효과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종의 문화현상이며, 연애편지이고, 라디오 방송이며, 중국의 고전주의적 해석학이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피를 쏟고 나면, 사람들은 납함 아래서의 침묵, 그러니까 일거에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비효과는 사탄도 펼칠 수가 있고, 천사들도 대항하면서, 혹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 펼칠 수가 있다. 일종의 병법처럼, 모든 것이 그와 같은 나비효과 안으로 들어가면 힘을 잃기 때문이다. 나비효과 안에서, 아이들이 급격하게 똑똑해지는 것은, 나비효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미래를 약속하지 못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인 것이다. 그것의 항목적 차이가 무엇인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숱한 나비효과 사이를 걸어가셨다. 제자들은 제자들 같지 않았으나, 마땅히 더 나은 제자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다. 나비효과는 결국 묵경이 되고 마는 것이다. 코스모 폴리탄들은 정말이지 불쌍하고, 그것의 현상과 기억을 알 뿐이지, 예수님이 나비효과를 걸어가셨다는 것을 지금껏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연의 기가 막힌 일치인지, 오영석 국무장관은 언덕에서 말고의 무리를 만나고 말았던 것이고, 그렇게 연결의 한 끝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항목적 차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과연 그것을 우리에게,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면서까지 전도하고자 하신 것일까? 어린아이들은 나비효과 사이로 피어나고, 나비효과 사이로 사라진다. 어린아이들이 목수만 되어도, 마음이 들뜨지 않고, 스스로 항목과 같은 말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부모 없이 태어난 생명들처럼, 또다시 그와 같은 섬망과 확률의 나비들 사이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사탄은 존재를 갖고 있고, 또한 무를 갖고 있다. 무를 갖고 있는 것은, 성경의 역사와 거의 함께 하는 수준이다. 우리가 고전이 없을 때는, 일일 일통닭 하는 것처럼, 밤낮 지진으로 시달렸었다. 아이들은 피어났고, 또한 속절 없이 실낙원하였었다. 예수님은 비밀이 있다. 그 누구도 예수님과 같은 주자학의 시간을 살지 못한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임금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임금도 예수님 앞에서는, 자기의 왕관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궁녀들이 삼천명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무슨 예수님인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그러하였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박해하였다. 그러나 사탄의 신학에 속하여서, 코드명 아리가또고자이마쓰를 하려고 하는데, 색즉시공, 생각하고, 간증하다 보니, 마음으로 간음한 자도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만일 사랑하는 여자가 다섯 명이라도 있다면, 도시에 열 명이라도 있다면, 그와 같은 의식에 침입하여서, 남자의 칼을 뺏고, 주변 사람들을 도리어 죽이고자 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신학의 시간을 살아갈 수가 없고, 다만 난봉하는 것이 세상의 가장 좋은 문화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의 베토벤 운명인 것이다. 그래서 존재와 무라고 하는 오래된 기술을 가진 사탄을 향해서, 우리도 똑같이 나비와 항목이라는 전술을 펼쳐야 했던 것이다. 오늘처럼 머리와 팔 다리가 없는 남자 시신이 한강에서 발견이 되어도, 우리가 별 일이 없는 것은, 그래도 슬픈 것이고, 이차돈은 다만 불교라도 인정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지금껏 말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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