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클래식이야기

지정생존자가 갖는 여러가지 문학적 근본 테제

by 마음대로다 2019. 8. 6.

지정생존자가 갖는 여러가지 문학적 근본 테제 





여러모로 이런 영화 혹은 드라마가 원작이 미국이라는 것에서 생각할 만한 점이 있다하겠다. 그러니까 아니꼬운 일이지만, 최고급 캐딜락을 우리가 얻어탄 것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아니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마만큼 그것의 차체는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신에 작품의 수용성이 원작을 별로 궁금하지 않게 할 정도로 거대하다는 것이다. 외국 사람에게는 쌩큐 하면서 대충 내리고, 우리끼리는 많은 한국말을 한다는 것이 분명 미안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공통 분모, 혹은 콘베이어 벨트와 같은 문제의 회전 스시집은 그들 엘리게이터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일 것이다. 미국은 문학이 사라졌다. 나다니엘 호돈의 소설은 소설인가 아닌가 하는 것도 초미의 관심이다. 하지만 헤롤드 블룸도 별로 그런 것에는 아라한과 같은 통찰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윌리엄 포크너는 어떠한가? 그의 소설은 소설인가? 아닌가? 철학인가? 포스터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평론이 없다는 것을. 평론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작품이라는 것은, 원래, 평론의 정권재창출이 불가능한 데서 피어나는 천년화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만나는 무수한 평론들은 무엇인가? 신문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이런저런 영화평론가들은 무엇인가? 그들은 분위기 메이커 같은 것인 것이다. 우리가 킹 메이커, 프린세스 메이커 같은 말은 들어도, 분위기 메이커 같은 말을, 그것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커피 메이커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평론가들은 댓글들처럼 메이커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러하고, 근본적으로 그러하며, 근원적으로 그러하다. 또한 영원히 그러하다. 작품은 그런 댓글들과 계급적으로, 생명적으로, 다른 길을 가면서 행하는 친절한 독백과 분열 같은 것이다. 재밌는 것이, 드라마에서 이런저런 댓글들을 묘사하는데, 막상 드라마에 대한 댓글들은 흥미가 없다는 것 일색인 것이다. 선수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 자기들이 희화화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반응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의 묘미는 어쩔 수 없음 같은 것이 있다. 현실성 같은 것을 따지는 것도 처음의 어쩔 수 없음이지만, 그것만 있지 않음의 어쩔 수 없음이 있고, 그것에 우리가 계속해서 기차 다음 칸을 여행하는 것 같은 기쁨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산다. 내가 서울에서 집으로 내려오는 기차에서, 광주역에서 내리는 대신, 백양사 역에서 내린 다음에, 근처 모텔을 찾아간다고 하자. 그것만큼 소설적인 것이 없다. 그와 같은 연잎은, 대체 뭐 하자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 것이다. 그것에 심취하면, 공부를 못하게 된다.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작은 알약들을 보았으며, 얼마나 나의 공부에 비해 만나는 구체성이 빈약하였는지 모른다. 작품을 할 수도 없었고, 비평을 할 수도 없었다. 작품을 하면, 연잎에 연잎을 더하는 것 같았고, 비평은 오직 나를 향한 수술과, 안타까움, 분명한 씨티촬영 같은 것 밖에 남은 과제가 없었다. 나는 국문학을 대충하였고, 성경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았으며, 철학은 아주 우수한 것이었고, 영문학에 대해서는 나를 아랍사람 핫산처럼 꾸며서 옥스포드에서 첫 강의를 해도 될 정도였던 것이다. 사상이란, 관념의 처음 주름과 같다. 복잡한 삼중 주름에서 극치가 생기며, 사중 오중으로 넘어가면, 진부해진다. 처음 주름에서 극치가 생기면, 사람들이 권위에 망설임을 느끼나, 도리어 흥분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미스 유니버시티에 관한, 전생을 이야기하다가, 인간론, 사랑론, 성애론에 관한 복잡한 이야기들로써, 그렇게 끝맺음을 내는 것이 민중신학에 대한 인사이트는 아니었으나, 결론적으로, 혹은 성리학적으로 그리하여서, 영자신문에 응모하여 당선된 논문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던 것이다. 아름답기 위해서 마지막을 미스 유니버스보다는 미스 유니버시티라고 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미 나는 관념의 삼중 주름에 도착한 것이다. 


대게의 사람들은 주름이 없이 진행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순간적인 삼중 주름이 생기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삼중 주름도 반복이 되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선생님으로 여기는 것이다. 확고부동한 삼중 주름이라는 것은, 데카르트, 그러니까 대가의 증거인 것이다. 이중 주름에서는, 작품이 끝나면, 자기도 목숨을 끝맺는 경우가 많다. 삼중 주름에서는, 생각하고,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오직 그럼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순간적인 삼중 주름도, 정신을 깨어있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언어와 의식의 상태에서는 다만 고통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공부할 시간이 없다. 그와 같은 자신을 돌아보면, 대단히 이중 주름이나, 주름조차 없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는 아직 주름이 없다. 주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다. 부모를 저격할 수 없다. 스파이나, 스나이퍼가 될 수 없다. 영화는 공부하는 사람에게 미스터 혹은 미스 유니버시티가 되라고 한다. 그것이 최고 영화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액션과 고통, 배우들의 내일이 없는 것 같은 호연은 다만, 반성을 통한, 언어적 지양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데, 그와 같은 과단성이나, 스스로의 지적인 이력이 개인에게는 무한하게 빈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랑하고, 아름다운 이중 주름 같다. 그리고 이런저런 논문을 쓰면서, 삼중 주름이 그와 같은 시비평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동학이, 동학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우리들 국문학 연구에서 극치에 가까웠고, 국사학은 그게 뭔지를 모르는 일이 되었으며, 우리들 이모텝 감독의 영화에서나 훌륭히 지적받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쪽으로 해가 지고나면, 이름이 너무 단순하여, 더 이상 언급하는 일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문학적 근본 테제는 이러하다. 어떠한 시나 소설의 경우, 그것이 아무리 덜된 것일지라도, 덜되었다는 고등한 의식이 반영된 비평을 만나고, 그와 같은 비평으로 열 개의 계단을 만들면, 훌륭한 작품이, 그러니까 시대적이고 문제적이 작품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문형 테제가 될 것이다. 그와 같은 퍼포먼스는, 작품의 거품과 같은 동질 발음의 운명처럼, 일리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일리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생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가끔 뜬다. 몇 가지의 일리를 말하고,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자가 일리를 언급하고, 남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테제는 댓글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것들이 아무리 문학적 가치가 없는, 일리의 흔적만 있는 무리 같은 것일지라도, 모으고, 뭉치고, 또한 날리고 하여도, 뭉치고, 뭉치고 또한 뭉치면, 눈도 뭉쳐서 눈뭉치라고 우리가 부르는데, 평론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대학 보고서를 작성할 때, 곧잘 사용하는 인용과 면적의 기법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존재와 시간 같다. 혹은 과정과 실재 같다. 우리는 그만큼, 뇌가 망실되는 것이다. 주름은 투표권과 같다. 다만 학생 서로 사랑을 하고, 남녀 농담이 심하며, 서로를 생각하면서 자위를 하고, 그것을 비밀로 해야지만 투표권이 생기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시간에 쫓겨서, 어쩔 수 없이 시간과 채움의 기법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뇌손상에도 별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뇌가 편안한데도, 그와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은, 일본 자위대와 더불어, 결혼하여, 인간이 사라진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한자는 거북이 등껍질로 점을 치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 길은 한 길이지만, 그 정도의 변수가 있는 것이다. 어지럽고, 중국의 출근길 같은. 훌륭한 댓글은 발견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다. 짧은 말은 훌륭한 평론이 될 수 없다는 철칙이 있다. 진지하고, 통찰이 있으며, 선의지가 있는 것으로는 백에 하나 가능하나, 문학적 레토릭까지 선명한 것은 우리가 거듭되는 대행의 사태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사는 어떠한가? 짧은 말이 아닌가? 문학적 레토릭은 언제나 어둡지 않은가? 항상 새롭게 흥분하지 않는가? 현상은 이중 주름의 작품만 같고, 그에 관한 기사는 영원한 댓글들 같은 것이다. 엄청나게 많아서, 프레스 기계가 어려울 것 같았는데, 실상은 종이 한 장 컨테이너 항구에서 굴러다니지 않는 것이다.....